[디지털투데이 추현우·정유림 기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으로 인한 글로벌 경제 위기가 현실화되고 있는 가운데 최근 중앙은행 발행 디지털화폐(CBDC·Central bank digital currency)에 대한 각국의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현금 사용률 감소, 신용카드 및 디지털 결제 수단의 보편화, 그리고 블록체인 기반 가상자산(암호화폐)의 등장으로 이른바 '돈'의 기능과 활용도가 점차 줄어들고 있다. 여기에 코로나19 확산에 따른 글로벌 경기 침체가 각국 법정화폐와 중앙은행의 영향력을 감소시키고 있다.

CBDC는 '돈의 디지털화'라는 추세 속에서 국가 주도의 통화정책과 화폐 유통 체계를 계속 이어갈 수 있는 대안으로 주목받고 있다. 올해 1월 국제결제은행(BIS)의 CBDC 관련 보고서에 따르면 전 세계 66개 중앙은행 중 80%가 CBDC 연구를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일찌감치 CBDC 개발에 들어가 '디지털 위안화' 개발을 준비 중인 중국과 달리 CBDC에 유보적이던 미국, 영국, 프랑스, 일본 등 선진국이 최근 태도를 바꿔 CBDC 발행에 대한 적극적인 검토에 들어갔다. 한국은행도 그간의 소극적 입장에서 벗어나 오는 2021년 12월까지 CBDC 시범 도입 추진 의사를 밝혔다.

가상자산과 코로나19 확산을 계기로 각국 중앙은행이 '종이 화폐의 소멸'을 받아들이고 CBDC를 준비하고 있다. 장차 디지털화폐 주도권을 잡기 위한 각국의 물밑 경쟁이 한층 가열될 전망이다.

미국
달러 패권국인 미국은 CBDC 연구와 개발에 대해 최근까지 소극적인 태도를 보여왔다. 그러나 지난해 글로벌 스테이블코인인 페이스북 리브라의 출현과 올해 코로나19 확산에 따른 경제 위기로 CBDC에 대한 입장이 빠르게 변하고 있다.

연방준비제도(Fed)가 CBDC 도입에 대한 검토에 들어갔고 미국 의회도 경기 부양책의 하나로 '디지털 달러' 정책을 밀고 있다. 디지털 달러 정책은 크리스토퍼 지안카를로 전 CFTC 위원장이 적극 지지하고 있다. 그는 "미국이 미래 디지털 경제 주도권을 잃지 않기 위해선 디지털 달러 도입을 서둘러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중국
중국은 미국의 달러 패권 견제를 위해 CBDC 도입에 가장 적극적인 국가 중 하나다. 중국 인민은행은 지난 2014년부터 CBDC 기초 연구를 시작했으며, 지난해 페이스북 리브라 출현을 계기로 디지털 위안화 발행을 공식 추진하고 있다. 특히 디지털 위안화 개발을 올해 2020년 최우선 과제로 선정하는 등 빠른 행보를 보이고 있다.

인민은행은 자체 디지털 위안화인 DCEP(Digital Currency and Electronic Payment) 디지털 위안화 발행을 위한 기술적 준비는 모두 마친 상태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미 주요 국영은행과 민간은행, 이동통신사, 텐센트, 알리바바 등 IT 기업과 협력하고 있으며, 올해 선전과 쑤저우 지역을 CBDC 시범 유통 지구로 지정해 운용할 계획이다.

일본
가상자산 산업을 장려하고 있는 일본은 정작 CBDC 발행에는 신중한 태도를 보여왔다. 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은행 총재는 지난해 12월, "일본 내 디지털화폐에 대한 대중적 수요는 없다"고 언급한 바 있다. 그러나 자금세탁 및 테러자금조달 방지 등 국제 권고안에 따른 관련 연구를 꾸준히 진행해 왔다. 독자 개발보다는 영국과 캐나다, 유럽연합(EU), 스웨덴, 스위스 등 유럽 주요 중앙은행과 CBDC 연구 협력 체계를 구축하는 등 국제 공조에 힘쓰는 모습이다.

유럽연합(EU)
유럽중앙은행(ECB)은 2019년까지 CBDC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보였다. 자금세탁은 물론 법정통화와 중앙은행의 위상에 금이 갈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그러나 가상자산 옹호론자로 알려진 크리스틴 라가르드 총재 취임 후 분위기가 바뀌고 있다.

영국
공식적으로 CBDC 도입에 부정적이던 영국은 영란은행을 중심으로 CBDC 발행에 관한 연구를 꾸준히 진행해 왔다. 특히 리브라 출현 후 디지털 화폐에 대한 잠재력에 눈을 뜬 모습이다. 올들어 ECB와 일본, 스웨덴, 스위스, 캐나다와 함께 CBDC 공동 연구 계획을 추진하는 등 변화된 태도를 보이고 있다.

프랑스
프랑스는 유럽에서 CBDC 도입에 가장 적극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다. 프랑스 중앙은행은 올초 CBDC 시범 운영 계획을 발표했으며, 오는 6월까지 사업자 지정 등 구체적인 준비를 완료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나아가 경제 인프라와 통화정책, 법률문제에 대한 대비책도 마련하고 있다. EU에서 '디지털 유로화'로 불리는 CBDC 도입에 대해 가장 큰 목소리를 내는 국가가 프랑스다.

스웨덴
스웨덴은 CBDC 발행을 일찌감치 준비한 국가다. 2016년부터 기초적인 단계의 CBDC 시범 사업인 e크로나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통화정책보다는 시민과 기업 대상 디지털 결제 수단으로 CBDC 활용을 다각도에서 실험 중이다.

러시아
러시아는 2019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주도로 CBDC 도입과 관련 법안 제정을 추진한 바 있다. 그러나 러시아 중앙은행의 반대 등 부작용 우려로 현재까지 뚜렷한 결론을 내지 못하고 러시아 의회에서 계류 중이다.

기타 국가
터키는 2019년 발표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CBDC 발행 계획을 포함했다. 2023년 이전까지 CBDC 발행을 추진한다는 목표다. 태국과 캄보디아는 스웨덴 e크로나 형태의 디지털 결제용 CBDC 기술 연구와 시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싱가포르는 중앙은행과 금융기관을 대상으로 한 기관 결제용 디지털화폐 개발을 위해 'Ubin'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베네수엘라는 자국산 석유를 기반으로 국영 가상자산인 페트로(Petro)를 발행했으나 아직 법정통화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상황이다.

한국은행, 2021년까지 CBDC 시범 발행 추진

한국은행도 최근 CBDC 시범 발행 계획을 내놓으면서 해당 연구를 구체화하고 있다. 올해 8월까지 CBDC 구현 기술을 검토하고 2021년 말까지 CBDC 파일럿 시스템 구축 및 테스트를 마친다는 방침이다.

그간 한국은행은 우리나라에선 디지털 결제 시스템 기반이 잘 갖춰져 있기 때문에 당장은 CBDC를 발행할 필요성은 없다고 봐왔다. 지금도 이런 입장에는 큰 변화가 없지만 국제 사회가 CBDC 연구에 속도를 내는 점, 지급결제 환경 변화 대응 등 차원에서 연구 구체화를 추진하는 모습이다. 

한국은행이 2020년 3월부터 2021년 12월까지 진행하는 CBDC 연구 추진 일정  출처: 한국은행
한국은행이 2020년 3월부터 2021년 12월까지 진행하는 CBDC 연구 추진 일정 /자료=한국은행

전문가들은 한국은행이 CBDC를 발행한다고 해도 우선 금융기관 대상 도매용 CBDC를 발행할 가능성이 높다고 내다봤다. 

권혁준 순천향대 경영금융학과 교수는 “한국은행에서 강조해 온 대로 우리나라에선 카카오페이 등 결제 시스템 기반이 잘 갖춰져 있어 소매용 CBDC를 대체할 수단이 이미 충분하다”며 “향후 한국은행이 도매용 CBDC를 발행한다고 하면 기존 통화와 비율을 어떻게 설정한 것인지 등 경제 상황을 고려해 얼마나 정확한 기준을 마련할지 과제”라고 설명했다.

한국은행 관계자는 “장기적으로 보면 디지털화폐 발행은 국회, 정부 등 사회적 합의가 반드시 필요해 한국은행에서만 단독으로 추진할 수는 없는 사안”이라면서 “디지털화폐 표준과 관련해 국제결제은행(BIS)이 회원국과 내용을 공유하겠다고 한 만큼 전 세계 표준을 토대 삼아 개별적인 연구를 병행해 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美 달러 패권 맞서는 中, 아·태 지역 디지털화폐 전쟁

전 세계에서 CBDC 발행·연구에 속도가 붙은 가운데 중국과 미국을 중심으로 CBDC 주도권 선점 경쟁이 본격화할 조짐이다. 중국이 지금과 같은 달러 기반 체제에서 위안화의 영향력을 높이는데 한계가 있다고 보고 더 적극 CBDC 발행에 나선 것이라는 관측이다.

중국 인민은행이 CBDC를 발행하면 우리나라에 미칠 파급력도 무시할 수 없다. 인민은행이 민간 영역에서 쓰이는 소매용 CBDC 즉 '디지털위안화'를 발행한다고 보면 동남아시아나 우리나라 등지에서도 충분히 유통이 가능해진다. 

우리나라도 현재 중국인 관광객 방문이 많은 지역 상점에선 위챗페이, 알리페이 등 중국 모바일 결제 서비스를 지원하고 있다. 모바일 결제를 통해 디지털위안화가 유통되면 이를 기반으로 한 생태계가 어떤 영역에서든 구축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장중혁 아톰릭스랩 이사는 “비트코인처럼 디지털화폐는 국경과 지역적 한계가 없다. 디지털화폐 주도권 경쟁이라는 건 결국 그 화폐가 사용되는 생태계가 자리를 잡고 영향력을 키워간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그는 "중국은 우선 아시아 태평양 지역을 중심으로 자국 디지털위안화 경제권이 구축 전략을 취해갈 것으로 본다. 우리나라로 이에 대응하는 CBDC 연구가 선행돼야 한다. 한국은행의 최근 입장 변화도 이러한 배경에 기인한 것”으로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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