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투데이 신민경 기자] 잘못을 인정하는 데 인색했던 재계가 속속 변모하고 있다. '거물급' 이해관계자로 우뚝 선 소비자들을 의식해서다. 일부에서는 욕설과 갑질 등 각종 논란에 부닥친 기업들이 자존심 대신 사과를 택하는 배경으로 '소비자 권리의식 부상'을 꼽고 있다.

22일 재계에 따르면, 과거 논란에 휩싸인 기업 대다수는 '어떻게 하면 과실에 대한 책임을 덜 질 수 있을까'에 관심을 쏟았다. 가습기살균제 사건만 해도 그렇다. 피해 문제가 수면 위로 오른 지 8년이 됐지만 애경산업과 SK케미칼은 공개적으로 책임을 인정한다거나 사과하지 않은 상태다. 지난 16일 갱신된 한국환경산업기술원의 통계 현황을 보면 가습기살균제로 인한 피해자 수는 6476명이고 총 1431명이 숨졌다.

양사는 각각 '가습기메이트'의 유통사와 제조사로서 유해물질 의혹이 불거진 2011년 전까지 제품 200만병을 팔았다. 이들이 제품 원료로 사용한 유독물 '클로로메틸이소티아졸리논(CMIT)'과 '메틸이소티아졸리논(MIT)'은 소비자들에게 호흡부전과 폐손상을 가져왔다. 하지만 지난 19일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첫 재판에서, 업무상과실치사 혐의로 기소된 애경산업과 SK케미칼 임직원들은 혐의를 전면 부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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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1월 가습기넷 등이 애경산업과 SK디스커버리를 재고발하기 위해 서울중앙지검을 찾았다. 사진은 한 시민단체 회원이 애경산업 고발 피켓을 들고 있는 모습. (사진=신민경 기자)

사과를 수년 동안 미룬 기업의 속내는 책임을 지는 데 민감했기 때문으로 읽힌다. 많은 사람들의 건강 이상을 두고 자사의 과실을 인정하면 책임소재가 확인되는 셈이어서다. 장동엽 참여연대 선임간사는 "피해자는 존재하지만 가해자가 없다는 건 어불성설"이라면서 "기업이 향후 책임질 일이 두려워 사과를 미루는 건 피해자에게 입증책임의 화살을 돌리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이어 "애경과 SK는 가해기업임을 받아들이고 자사가 해당 제품을 얼마나 많이 팔았는지 밝히고 피해규모를 적극 추산했어야 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사과를 미루는 기업들이 점점 줄어드는 모양새다. 의혹이 제기됨과 동시에 사과문이나 해명글을 올리는 등 기민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지난달 치킨 프랜차이즈 BBQ의 일부 점주가 신메뉴가 입고되지 않는 동안 기존 메뉴를 신메뉴로 둔갑해 판매한 게 드러나 빈축을 샀다. 이 사실을 처음 영상으로 알린 이는 구독자 130만여명을 가진 먹방(먹는 방송) 유튜버 '홍사운드'다. 영상 게시 2시간 만에 BBQ 본사는 이 유튜버에 연락을 취해 사과했다. 이튿날 보상과 향후 조치를 담은 사과문을 올릴 것도 약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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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한 한국콜마 회장이 지난 11일 사임 의사를 밝히며 대국민 사과를 하고 있다. (사진=신민경 기자)

앞서 지난 7일엔 윤동한 한국콜마 회장이 직원 700여명을 대상으로 가진 월례조회에서 비속어가 난무한 보수 유튜버 '리섭TV'의 영상을 틀어 여론의 공분을 산 바 있다. 해당 영상에서 리섭은 "아베가 문재인의 면상을 주먹으로 치지 않은 것만 해도 넌무나 대단한 지도자임에 틀림 없다"며 문 대통령을 극단적으로 깎아 내렸다. "베네수엘라의 여자들은 단돈 7달러에 몸을 팔고 있다. 이제 곧 우리나라도 그 꼴이 날 것" 등 여성을 비하하는 표현도 사용됐다. 부정적 여론이 확산되자 나흘 만인 11일 윤 회장은 자사 종합기술원에서 대국민 사과 기자회견을 열고 사임의사를 밝혔다.

최근엔 치킨 프랜차이즈 멕시카나의 한 가맹점주가 소비자를 대상으로 욕설을 하고 집주소를 대며 위협을 가한 사실이 드러나 논란이 됐다. 배달 예정시간에서 2시간이 경과해도 오지 않자 항의 전화를 건 소비자에게 "싫다면 주문 취소하라" "그대로 집에 있어라" 등의 폭언을 한 것이다. 이에 멕시카나 본사는 해당 글이 커뮤니티에 게시된 이튿날 공식 홈페이지에 사과문을 올리고 시정 의사를 밝혔다.

과거와 달리 기업들이 각종 문제에 신속하게 피드백을 하게 된 건 SNS(사회관계망서비스) 이용 보편화로 소비자의 입김이 세진 것이 주요하게 작용한 것으로 분석된다.

최근 일본의 선제적 수출 제재 조치에 따라 일본 관계사 등이 소비자 집단 불매운동에 허덕이고 있다. 실제로 유니클로는 매출에서 두자릿수 하락을 겪었고 폐점 조치를 잇따라 취하는 중이다. 소비자 권리로 기업의 존폐를 좌우하게 된 사례다. 온라인 공론장이 활성화하고 윤리경영에 대한 수요가 늘면서 소비자가 기업의 이해관계자 가운데서 이른바 '큰손'으로 대두된 것이다.

이동기 서울대 경영대학원 교수는 디지털투데이에 "수년 전만 해도 기업이 피해를 덜 보려면 최대한 늦게까지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는데 요즘은 빨리 수긍하고 개선 의지를 보이는 게 모범적인 대처가 됐다"면서 "불매의 희생양이 안 되려면 회사 구성원들이 매사 발언에 유념하고 투명·정도경영을 위해 힘써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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