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휴대폰을 놓고 출근했다면? 애초에 전화기가 발명되지 않았다면?

오늘날 이동통신서비스를 기반으로 한 휴대폰은 단순 전화 기능을 넘어 ‘손 안의 PC’로 불리며 새로운 생태계를 구축해가고 있다. 아이폰의 도입으로 스마트폰 전성기를 맞더니 이제는 스마트 워치 등 다양한 웨어러블 기기로 탈통신을 향해 가고 있다.

30년 전,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무선호출기(‘삐삐’)가 등장했다. 이후 부의 상징이었던 차량용 무선전화기(카폰)을 거쳐 오늘날 4세대(4G) LTE 이동통신으로 진화했다. 현재 이동통신서비스는 225Mbps, 300Mbps 속도의 광대역 LTE를 넘어서 10Gbps의 5세대(5G)이동통신까지 눈 앞에 두고 있다.

이에, 아이티투데이는 대한민국 이동통신 30주년을 맞아 이동통신 탄생부터 광대역 LTE 개화기인 현주소까지 주요 이슈를 짚어보고 향후 발전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 국민 생활과 기업 문화에 혁신을 가져온 이동통신의 과거부터 미래까지 10부에 걸쳐 조망한다. [편집자주]

[아이티투데이 이호연 기자] “이통3사는 2014년 1월부터 사물인터넷 개념으로 예전 삐삐번호 ‘012’를 사용할 수 있다”

지난해 11월 미래창조과학부가 삐삐번호 012를 부활시켜 화제가 됐다. 1980년대 출현한 ‘삐삐’는 우리나라 이동통신 서비스의 태동이라 할 수 있는 무선호출 서비스다. 정부 정책으로 국민들은 약 30년의 격차를 뛰어넘고 스마트폰과 삐삐 사용이 공존하는 흥미로운 상황을 맞이하게 된 것.

우리나라 이동통신 서비스는 1984년 SK텔레콤의 전신인 한국이동통신서비스(주)가 ‘차량전화(카폰)’ 서비스와 무선호출서비스를 제공하면서부터 서막이 열렸다. 이후 국내 이동통신은 주로 무선 호출, 셀룰러 이동통신 및 PCS와 같은 이동전화 서비스와 기타 서비스로 나눠 발전해왔다.

우선 본격적인 휴대폰이 등장하기 전인 1세대 이동통신부터 살펴보자. 1세대 이동통신은 디지털 대신 음성통화 서비스만 가능했던 아날로그 방식이 사용됐으며, 1984년부터 1996까지다.

▲왼쪽부터 카폰 사용하는 모습, 88년에 휴대폰 사용하는 모습, 오늘날 배우 김수현이 스마트폰을 들고 있는 모습 (출처= SKT 공식 블로그)

◇ ‘1004’, ‘8282’ 시작은 삐삐로...
인기 드라마 ‘응답하라 1994!’에서는 남녀 주인공의 애틋한 사랑을 전달하는 주요 매개체로 삐삐가 등장한다. 특히, 쓰레기(정우)가 나정(고아라)의 친구들과 소개팅을 하자 나정이 삐삐 메시지를 보내 찐한 경상도 사투리로 소개팅을 빨리 끝내라고 독촉하고, 이에 얼버무리는 쓰레기의 모습이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다.

국내 이동통신 시초는 일명 ‘삐삐’라고 불리던 무선호출서비스라고 볼 수 있다. ‘삐삐’는 공중통신망과 무선호출 시스템을 이용해 호출이나 데이터 전송 서비스를 제공하는 무선 통신 서비스다. 당시 체신부는 ‘무선호출 서비스 기본 계획 수립’에 따라 1982년 12월 일본 NEC사의 시스템으로 서울 지역에 신호음방식 1만 회선을 설치해 보급했다.

▲ 추억의 삐삐 (사진 = 응답하라 1994 캡쳐)

이 무선호출 서비스는 단말기 가격과 저렴한 통신요금으로 90년대 중반까지 지금의 스마트폰 못지 않은 인기를 누렸다. 특히, 1986년 3월 ‘삐삐’거리는 신호음(Tone)만 전달하는 방식에서 신호음과 함께 전화번호 숫자를 알려주는 방식(Tone&Display)으로 바뀌면서 부산, 대구, 대전, 광주 지역으로 빠르게 확대됐다.

‘1004(천사)’ ‘8282(빨리빨리)’ ‘17175(일찍일찍와)’ 등의 흡사 암호와 같은 번호가 등장하기도 했다. 사용자들은 012, 015 등의 사업자 식별번호로 시작하는 번호에 전화를 걸어 일반호출과 음성녹음을 남기는 방식이다. 상대방은 삐삐단말기에 찍힌 호출번호로 전화를 걸어 발신자를 찾았다.

삐삐 가입자가 빠르게 증가하면서 무선호출은 서비스 개시 5년만인 1988년 12월 28일 10만 가입자 시대를 열었다. 이후 1995년 11월 6일에 가입자 500만명을 돌파했으며, 1997년에는 가입자수 1519만명으로 정점을 찍었다.

삐삐는 90년대 트렌드로 자리잡았는데, 사업자들은 이를 놓치지 않고 마케팅에 적절히 이용하기도 했다. SK텔레콤은 HOT, 젝스키스 등 당시 최고의 아이돌 스타들이 총출동하는 ‘스피드 012콘서트’를 개최해 화제가 됐다. 해당 콘서트는 청소년들이 가장 가고 싶어하는 행사로 꼽히며 삐삐의 인기를 방증했다.

삐삐의 수요가 늘면서 1995년 문자 메시지를 주고 받을 수 있는 삐삐, 1997년 ‘시티폰’ 발신 전용 휴대폰 등도 등장했다. 그러나 가격이 상대적으로 비싸고, 통화품질이 좋지않아 활성화되지 못했다. 이후 삐삐는 개인휴대통신(PCS) 사업자가 등장하면서 내리막을 걸었다.

◇카폰 서비스 첫해 가입자 2678명
본격적인 국내 이동통신서비스는 한국이동통신서비스(주)가 차량전화(‘카폰’) 서비스를 시작하면서부터다. 한국전기통신공사(현 KT)는 차량전화와 무선호출 서비스 업무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이용자 편익 증진을 위해 1984년 3월 29일 한국이동통신서비스를 전액 출자해 설립했다.

구의동 광장전화국 한편에 사무실 한칸을 임대하고 납입자본금 2억5000만원, 직원 수 32명의 초라한 출발이었다. 이 회사는 1984년 3월 18일 카폰 업무를, 4월 2일에는 무선호출서비스를 각각 개시했다. 이후 한국이동통신서비스는 1994년 정부투자기관 민영화 시책에 따라 선경그룹이 경영권을 인수해 1997년 SK텔레콤으로 사명이 변경된다.

카폰 서비스를 시작한 한국이동통신서비스는 그 해말 가입자 2658명 매출액 3억9000만원을 기록한다. 현재 SK텔레콤은 가입자수 2700만명을 돌파, 연간 매출액(2013년 기준) 16조 6021억원을 기록하는 국내 1위 통신사로 자리잡았다. 올해 연간 매출액 목표는 17조4000억원에 달한다.

▲ 왼쪽부터 한국이동통신서비스주식회사. 현재 을지로에 위치한 SKT T타워 (제공=SKT)

◇국산 1호 휴대폰...폰이야 냉장고야?
당시의 휴대 전화는 부의 상징이었다. 가격만 200만~400만원을 호가했으며, 오늘날 휴대폰과는 휴대성과 기능 등에서 크게 뒤떨어졌다. 국내 이동통신 휴대폰의 시초는 1984년 5월 첫 출시된 ‘카폰(Car Phone)’이었다.

카폰은 차량에 장착해 이동중에 통화할 수 있는 차량 전화기다. 가격은 차량전화 단말기와 가입비를 합하면 당시 포니2자동차(347만~400만원)와 맞먹었다. 여기에 월 기본료 2만7000원, 8초당 20원, 단말기 유지보수료 월 1만원 등이 사용료로 부과됐다.

▲ 왼쪽부터 국산 1호 휴대폰 삼성전자의 SH-100, 갤럭시S5 (제공 = 삼성전자)

실제 카폰 이용자는 고위 관료나 갑부에 한정됐으며 서울, 안양, 수원 등 수도권 일부지역에서만 제공됐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폰의 인기는 폭발적이었다.

서비스를 개시하자마자 신청자가 쇄도하면서, 한 달 사이에 가입신청자가 2000명에 달했다. 1년에 가입할 수 있는 회선은 3000회선에 불과했는데, 카폰 가입신청자의 급증으로 5000회선을 앞당겨 공급할 정도였다.

카폰 서비스가 인기를 끌자 웃지 못할 에피소드도 발생했다. 과시용으로  카폰 안테나만 장착한 가짜 카폰 차량이 등장하는가 하면, 카폰 판매를 알선해주고 수수료를 챙기는 카폰 복덕방까지 출현했다. 이러한 현상은 대중화되지 못한 이동통신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과 열망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였다.

1988년에는 첫 상용 휴대폰이 보급되기 시작했다. 정부가 88서울올림픽을 맞아 통신 지원을 원할히 수행하고 휴대전화 대중화를 앞당기기 위해 보급을 서두른 것. 7월 1일 수도권을 중심으로 처음 도입된 휴대폰은 1991년 전국망, 1993년에는 전국 74개시 전역 및 읍 단위까지로 서비스 제공 영역이 확대됐다.

이미 선진국에서는 500g~1kg의 휴대 전화가 경쟁적으로 개발되고 있었다. 세계 최초 휴대폰은 모토로라 다이나택(DynaTAC)8000 모델로 잘 알려졌다. 국산 최초 휴대전화는 삼성전자가 개발한 SH-100 모델로 높이 40cm, 무게도 0.7kg에 달했다. 한 손으로 들기엔 팔이 휘청거리고 두께도 만만치 않아 ‘냉장고 폰’ ‘벽돌폰’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SH-100은 88올림픽때 처음 등장해 이듬해 5월 일반인에게 판매되기 시작했다. 400만원의 고가에도 불구하고 전세계 포함 1000만대 이상의 판매고를 올렸다. 벽돌폰이라 불리긴 했지만 카폰보다는 휴대성에서 훨씬 향상된 모습을 보였기에 가입자가 늘며 휴대전화 시대를 개막했다.

◇이동통신 대중화 ‘활짝’...100만 가입자 돌파
최초 휴대폰의 도입은 외국 업체는 물론 삼성전자, 금성통신(현 LG전자), 현대전자 등 국내 제조업체들의 경쟁을 부추겼다. 이들 제조업체간 판매 경쟁이 가속화되면서 단말기 가격도 점차 인하되며 이동전화의 보급이 촉진됐다.

여기에 한국이동통신이 통신 요금제를 저렴한 수준으로 개편하면서 요금 체계에 일대 변혁을 가져왔다. 1990년 6월 1일 처음으로 전국 단일 요금제를 실시한 것. 통신 요금을 거리나 단계로 차등을 둔 기존 방식에서 전국적으로 단일 요금을 적용했다.

▲국내 첫 대리점 시초라 할 수 있는 '카폰 전시장'(왼쪽)과 현재의 SKT 대리점

특히, 51km이상 장거리 구간에서는 일반 유선 전화보다 휴대전화가 가격 경쟁에서 훨씬 앞서면서 이동전화 가입자 증가세도 더욱 빨라진다. 이에 1991년 국내 이동전화 가입자 수는 10만명, 4년 후인 1995년에는 100만명을 돌파한다.

이후 각 사업자들의 기지국 증설과 품질 및 기술 개발 등을 통해 국내 이동전화 가입자는 2010년까지 5000만명을 돌파한다. 현재 2014년 1월 말 기준 약 5482만명을 기록, 국내 총 인구수 5000만명을 넘어서면서 휴대전화는 일상 깊숙이 파고들었다.

저작권자 © 디지털투데이 (DigitalToday)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