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티투데이 이호연 기자] “깨끗하고 선명하군요. 그런데 디지털 음성이다보니 마치 기계음처럼 들리네요”

1996년 1월 1일, 한국이동통신(SK텔레콤 전신)이 세계 최초로 코드분할다중접속(CDMA) 방식의 디지털 이동전화 서비스를 상용화했다. 이로써 대한민국은 2세대(2G) 이동통신서비스 시대를 가장 먼저 개막하며, 기술 종속국에서 기술 주도국으로 비상한다.

CDMA 상용화는 한국이동통신 역사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기술적으로는 이동통신서비스 방식이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바뀌면서 음성통화 외에도 문자메시지, 이메일 등의 데이터 서비스가 가능하게 됐다.

휴대폰 보급 측면에서는 CDMA에서 진화된 개인휴대통신(PCS) 시대가 개막하면서 휴대폰 대중화를 견인했다. 얼굴 크기만한 벽돌폰에서 일반 휴대폰(폴더폰)이 등장한 것도 이 시점이다. 여러 업체가 앞다퉈 휴대폰을 출시하면서 단말기 가격도 400만원대에서 20만~30만원대로 떨어졌다.

▲ 1996년 한국이동통신이 CDMA 상용화를 시작한 당시, 이수성 전 국무총리가 전화를 하고 있다.


◇2G 시대 열렸다...CDMA란?

우리가 흔히 말하는 3G, 4G 등의 G는 세대를 뜻하는 '제너레이션(Generation)'의 약자다. 이동통신기술 세대를 뜻하는 용어로, 모바일 네트워크 전송속도를 기준으로 나눠진다. 세대 구분은 ‘국제전기통신연합(ITU : International Telecommunication Union)에서 주관한다.

▲ 국내 최초 CDMA 단말. 삼성전자의 SCH 100 (사진 출처 = mylove2u.com)

우리나라는 CDMA를 상용화하면서 2G 시대에 진입한다. 그렇다면 CDMA란 뭘까? CDMA는 미국의 퀄컴이 개발한 디지털 이동통신 방식으로 다중접속 기술의 한 종류다. 이동통신은 주파수라는 한정된 자원을 이용하는데, 이를 효율적으로 분배하는 방법이 다중접속이다. 쉽게 말하면 여러 사람이 같은 주파수 대역을 효율적으로 쓸 수 있는 기술이다.

다중접속 기술에는 분할 방식에 따라 주파수 분할방식(FDMA), 시간분할방식(TDMA), 코드분할방식(CDMA)이 있다. 이 중 CDMA는 아날로그 형태인 음성을 디지털 신호로 전환해 여러 개의 디지털 코드로 변환, 주파수를 여러명이 사용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즉, 한개의 방(주파수)안에 여러 사람이 말을 하는데 각자의 언어(코드)로 소통해 자신과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상대방의 목소리 외에는 모두 잡음으로 들리는 개념이다.

이는 하나의 채널로 한 번에 한 통화밖에 하지 못하는 아날로그 방식의 한계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다. CDMA는 아날로그 방식에 비해 수용 용량도 10배 더 높고, 통화품질이 우수하다는 장점이 있다.

우리나라는 TDMA를 채택한 2G 이동통신 서비스가 어렵자, 1993년 11월 당시 체신부 고시를 통해 CDMA를 2G 표준으로 공식 결정한다. 이후 1996년 세계 최초로 CDMA가 상용화된다.

◇전쟁같았던 날들의 연속...“CDMA는 안 돼”
한국이동통신에 의해 국내 최초로 시작된 아날로그 방식의 통신 서비스는 비효율적 주파수 이용으로 인해 한계를 보이기 시작했다. 통화가 끊어지는 일이 비일비재 했으며, 품질 또한 불량했다.

단말기 가격과 통화요금은 여전히 장벽이 높았으며, 단말기나 시스템 모두 해외 제품에 의존했다. 2세대 이동통신인 디지털 이동통신 시스템 개발은 시대적 요구였다. 당시 선진국들은 이미 디지털 방식 개발에 뛰어든 상황. 한국은 후발주자로서 더욱 더 경쟁력 있는 기술이 절실했다.

문제는 다양한 디지털 이동통신 방식 중 어떤 것을 표준으로 채택하는지 여부였다. 미국은 시간분할방식(TDMA), 유럽은 유럽형 이동전화(GSM) 방식, 일본은 일본식 디지털(PDC)방식을 채택했다. 디지털 방식 개발을 주도했던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는 TDMA방식을 고려했으나, 주파수 처리 용량의 한계 때문에 전략을 수정한다. 

▲ CDMA 기술 개발 연구가 이뤄졌던 한국이동통신 중앙 연구소. (사진출처 = SKT 공식블로그)

ETRI의 눈에 띄었던 것은 당시 미국의 작은 벤처에 불과했던 퀄컴의 CDMA 기술이었다. CDMA의 전파 효율성은 기존 아날로그 방식의 10배, TDMA의 3배에 달했다. 다만, CDMA 방식은 상용화 사례가 전무했다. 서비스 상용화에 뛰어든 국가도 없었다. CDMA 상용화 개발에 뛰어든다는 자체가 모험이었다.

1991년 5월 6일 ETRI와 퀄컴은 CDMA기술 공동개발 계약을 체결한다. ETRI는 퀄컴, 국내 제조업체와 함께 이동통신 시스템의 공동개발 사업을 추진한다. 그러나 CDMA 상용화는고난의 연속이었다. 실험실 수준의 CDMA에 국가 예산을 투입할 수 없다는 의견이 빗발쳤다.

특히, ‘CDMA 불가론’은 끝까지 발목을 잡았다. CDMA 상용화 기술 개발이 막바지에 이르던 시점까지 다수의 사업자, 국회, 청와대 일부까지 CDMA 불가론을 내세웠다. 당시, CDMA 기술 개발을 총괄하던 양승택 ETRI소장(전 정보통신부 장관)이 이를 반대하던 신세기 통신, 한국통신 경영진, 청와대 박세일 수석 등을 만나 담판을 지은 것은 두고두고 회자될 정도다.

CDMA 기술 개발은 1993년 체신부가 제2 이동통신 사업자 선정 조건에 CDMA 방식 채택을 못박고, 경쟁 체재로 변환하면서 변곡점을 맞는다. 체신부는 전자교환기(TDX)개발 주역인 서정욱 단장을 중심으로 이동통신 기술개발 사업관리단을 한국이동통신내에 발족한다. CDMA 공동개발 방식 또한 업체간 경쟁 개발로 변경한다.

◇한국이동통신, CDMA 시연통화 성공
CDMA 개발이 경쟁체재로 변경된 이후, 한국이동통신과 신세기통신이 CDMA 기술 개발에 경쟁적으로 가세한다.

한국이동통신은 1994년 11월 18일 서울 장안동 연구실에서 삼성전자와 현대전자의 시험장비를 가동, CDMA 방식 시스템 운용 시험에 성공한다. 이후 해당 기술을 서울 200여개의 기지국에 최적화하는 작업을 거친다. 신세기통신 역시 상용화를 위해 망 구축에 박차를 가하며, 두 업체가 CDMA 상용화 세계 최초 타이틀을 따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펼친다.

CDMA 시스템 개발이 탄력을 받기 시작할 무렵, 선경그룹의 한국이동통신 인수가 이뤄진다. 내부적으로는 인사 개편에 따른 전직원의 동요, 대외적으로는 한국통신(KT의 전신)이 PCS 사업권을 획득한다는 방침 아래 CDMA 개발 참여 대신 GSM 방식 도입을 검토한다. 대내외적으로 한국이동통신의 미래가 CDMA 상용화 성공 여부에 달린 상황.

CDMA 상용화에 관여했던 업계 관계자는 “사업관리단 연구원은 물론 엔지니어들은 상용화 목표일자까지 모든 휴일을 반납하고 여기에만 매달렸다”며 “당시 서정욱 한국이동통신 사장이 크리스마스 이브를 맞아 케익을 사들고 퇴근하려던 직원들을 불러모아 CDMA 개발을 독려, 크리스마스 휴일까지 반납하고 CDMA 개발에 전념했다”고 회고했다.

한국이동통신이 신의 한수를 사용한 것은 1995년 6월 12일에 개최된 코엑스 95정보통신 전시관에서 예정된 CDMA 시연회였다. 서정욱 사장이 시연회로 가는 버스안의 기자들과 자사의 CDMA 시스템으로 통화를 나눈다는 묘수를 낸 것.

통화가 도중에 끊어질 경우, 큰 망신을 각오해야 하는 위험한 시도였으나 대성공을 거뒀다. 승용차에 탑승한 서정욱 사장이 기자단을 태운 버스 안으로 통화를 시도했는데, 하얏트호텔에서 코엑스까지 이동하는 도중에 한 번도 통화가 끊기지 않았다.

◇CDMA 첫 상용화...가입자 15배 증가
1996년 1월 한국이동통신이 국산 CDMA 시스템 상용화가 어려울 것이라는 우려를 씻고 세계 최초로 전국 상용서비스를 시작한다. 1월 1일 인천 및 부천 지역에서 CDMA 기반의 디지털 이동전화 서비스를 시작한 뒤, 9개월만에 전국 주요 도시에 이를 상용화한다. 같은해 4월 신세기 통신도 CDMA 전국 상용서비스를 시작한다.

이는 CDMA 원천 기술의 발원지인 미국을 포함한 다수의 통신 선진국조차 하지 못했던 것을 성공시킨 쾌거였다. 한국의 CDMA 상용화는 전세계를 뒤흔들었다. 새로운 기술 주도국의 탄생이었다.

▲ CDMA 상용에 따른 국내 경제 효과. (자료 출처 = SKT 공식 블로그)

서비스 대상 인구는 약 3502만 5000명으로 당시 우리나라의 전체 인구의 79%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CDMA 상용화는 국내 이동통신 가입자의 폭발적인 증가를 가져온다. CDMA 상용화 직전인 1995년 150만명에 불과했던 이동통신 가입자 수는 2000년 2700만명으로 15배 가량 증가한다.

CDMA가 국가 IT산업에 끼친 영향도 각별했다. 에트리에 따르면 CDMA 상용화 이후 5년 동안 생산유발 효과는 125조, 부가가치 유발 효과는 65조, 고용유발은 142만명에 달했다.

또한 우리나라가 처음으로 세계 시장에 진출하는 계기가 됐다. CDMA 상용화 당시 전세계 가입자는 0.3% 수준이었는데, 2004년에는 63개국 178개 업체가 CDMA를 채택하며 이동통신의 주류를 이룬다.

이는 단말기 제조업체들이 CDMA를 기반으로 한 내수시장을 바탕으로 차후 글로벌에 진출하는 근간이 되었다는 평가다. 국내 이동전화 단말기 수출액은 1996년 해외 시장 첫 진출 당시 47만달러였는데, 7년 후인 2003년 134억 달러에 달하며 2만7000배의 폭발적인 성장을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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