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티투데이 김문기 기자] 011, 016, 017, 018, 019

듣기만 해도 새롭다. 예전 이동통신 식별번호다. 이제는 010으로 통합돼 역사 속으로 사라진 추억의 번호지만 이 번호들이 청소년, 어른, 어르신 모두가 손 안에 휴대폰을 들 수 있게 해줬다. 특히 PCS(Personal communication services)의 도입은 1인 1 휴대폰 시대를 위한 구름판 역할을 톡톡히 했다.

▲ 플립 형태에 이어 폴더폰이 인기였던 PCS 시절(사진 : 삼성전자)

이동통신 시장, 5개 세력으로 재편
“황금알을 낳는 거위”
당시를 회상하는 통신업계 관계자에게 PCS에 대해 묻자 바로 튀어나온 한마디다. 말 그대로 PCS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여겨졌다.

국내 PCS의 시작은 지난 1995년 7월 4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정부에서는 WTO체제의 출범에 따른 통신시장 개방에 대비, 통신사업 경쟁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었다. 이에 무선호출과 PCS, 주파수공용통신(TRS) 등 기본 및 신규 통신서비스 사업에 대해 진입 제한을 철폐하고 민간 기업의 신규 참여를 허용해야 한다는 기본 정책 방향이 발표됐다.

정책 방향이 결정되자 국내 ‘빅4’라 불렸던 삼성, 현대, 대우, LG 등 내노라하는 대기업들이 PCS 사업권 경쟁에 나설 것을 공식화하고 추진팀을 구성하는 등 발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기업들의 바람에도 불구하고 정부 방침 발표는 지연의 연속이었다. 기업간 허가기준에 대한 이견과 총선을 앞둔 정치논리가 화근이었다. 후속조치는 점점 더 멀어졌다. 결국 같은해 9월 7일 경상현 정보통신부 장관이 기자회견을 통해 “늦더라도 경쟁력있게 만드는 게 중요하다”면서 통신사업자 허가 추진 일정을 내놨다. 일정은 12월 허가신청요령 공고, 1996년 4월에서 5월 사이 허가신청서 접수 및 심사, 같은해 6월 선정법인 발표로 정해졌다. 사업자 선정 일정이 기존보다 6개월 이상 연기된 셈이다.

연기된 일정에 더해져 허가 공고도 수정됐다. 1996년 3월 이석채 정보통신부 장관이 통신사업자 허가 공고에서 사업계획서를 중심으로 사업권 3개를 한국통신(KT)이 설립하는 자회사와 장비제조업체, 비장비제조업체에 각 1개씩 배정한다고 발표했다. 이에 따라 PCS사업권 획득을 위한 경쟁구도도 다시 재편됐다.

우선적으로 기간통신사업자인 한국통신(KT)의 자회사는 기본적으로 PCS사업권을 획득할 수 있게 됨에 따라 나머지 2개의 사업권에 누가 달려들지 초미의 관심사로 부상했다. 특히 대기업과 중견 및 중소기업들간의 컨소시엄을 우대한다는 방침 덕분에 관련기업들의 협력이 활발하게 이뤄졌다.

결론적으로 장비 제조업체는 2파전으로 나뉘었다. 삼성과 현대의 주도로 아남산업, 대한전선, 태일정밀, 국제전자, 한국컴퓨터 등 154개 업체가 참여한 ‘에버넷’ 진영과 LG를 주도로 기아, 일진, 한라, 태영, 하이게인안테나 등 117개사가 모인 ‘LG텔레콤’이 각축전을 벌였다. 비장비업체는 금호와 효성이 주도하고 대우통신, 국제전산, 태창, 코리아컴퓨터, 조흥은행 등 533개 사업자가 모인 ‘글로텔’ 군단과 데이콤, 한화, 쌍용, 고합, 신한은행 등 288개 사업자와 함께 한솔 주도로 결성된 ‘한솔PCS’, 그리고 중소기업중앙회를 중심으로 한국정보통신, 맥슨전자, 팬택, 홍창물산 등 14295개사가 결집한 ‘그린텔’의 삼파전 양상으로 흘러갔다.

▲ LG텔레콤 창립총회 (사진 : LG유플러스)

1996년 4월 15일, PCS 사업권을 두고 본격적인 접수가 시작됐다. 통신업계 한 관계자는 “당시 서울 광화문 세안빌딩에 사업계획서를 접수해야 했는데, 총 2만3000여 쪽에 달하는 계획서를 전달하기가 쉽지 않았다”라며, “결국 트럭까지 동원되는 진풍경이 연출됐다”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경쟁은 접수 후에 더욱 치열하게 전개됐다. 장외 공방전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마침내 6월 10일 PCS 신규 사업자가 결정되기에 이르렀다. 장비업체제조군에서는 LG텔레콤이, 비장비업체군에서는 한솔PCS가 사업권을 획득했다.

▲ LG, 한솔이 PCS 사업자로 선정됐다 (사진 : imbc.com)

당시 PCS사업권 획득 과정은 TV로 중계됐는데, 이를 지켜본 구본무 LG 회장은 생맥주 파티를 지시하며 그룹 사장단과 임직원 20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빌딩 지하에서 자축연을 가지기도 했다. 그만큼 PCS에 대한 열망이 컸음을 대변해준다. LG그룹 한 임원은 1966년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정부가 추진한 제2정유 사업자로 호남정유가 지정되면서 연일 축제 분위기에 들떠 있었다며 “꼭 30년 만에 그룹 축제가 열린 셈”이라며 감격에 겨워 했다는 후문도 떠돌고 있다.

사업권 획득에 이어 LG텔레콤은 1996년 7월 11일, 한솔PCS는 8월 1일, KTF가 12월 27일 공식 출범했다. 각각의 식별번호는 019, 018, 016으로 결정됐다. 발빠르게 인프라 구축과 시범 서비스의 과정을 밟은 결과 1년 2개월만인 1997년 10월 1일 PCS 3개 사업자가 일제히 상용 서비스를 개시했다. 본격적인 PCS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 때부터 국내 이동통신 시장은 셀룰러 서비스를 운영 중인 한국이동통신과 신세기통신 등과 함께 5개 사업자의 불꽃튀는 경쟁이 시작됐다.

휴대폰 대중화 첨병 역할 ‘톡톡’, 마케팅 전쟁으로 인해 ‘휘청’
“집에 전화 해보세요”
“누구에게 전화 해보세요”
언듯 보면 비슷하지만 사실은 크게 다른 말이다. 이동통신에서는 그렇다. 5개 사업자가 본격적인 경쟁체제에 들어서면서 가장 많은 변화가 감지된 곳은 바로 사용자들의 생활패턴이었다. 유선으로 대변되던 통화 주체는 특정 개인으로 바뀌었다. ‘개인적인 소통 서비스(personal communication services)’. 약자로 이뤄진 PCS를 풀어보면 이런 뜻이 도출된다. 1인 1휴대폰 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셈이다.

▲ 현대 걸리퍼 광고 이미지 (사진 : SKTworld 블로그)

PCS는 한국이동통신과 신세기통신이 운영하는 셀룰러 서비스와 동일한 CDMA 기술을 기반으로 한다. 약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800MHz 주파수 대역을 활용한 CDMA를 ‘셀룰러’, 1.8GHz 주파수 대역을 활용한 CDMA를 ‘PCS’라 표현할 수 있다. 기술용어이긴 하지만 어느 정도는 마케팅적인 요소가 배합됐다. 2011년 종료된 KT의 2G 서비스나 최근 LG유플러스가 운영 중인 2G도 PCS라 말할 수 있다. 다만 지난 시간만큼의 기술 진화가 이뤄진게 다르다면 다르다.

단순히 주파수 대역이 다르다는 것은 많은 관련 요소들을 변화시킨다. 저주파의 경우 보다 유연하게 멀리갈 수 있기 때문에 장애물이 있더라도 쉽게 피해간다. 예를 들면 천천히 달리는 자동차가 더 멀리 가기도 하고 구부러진 길도 쉽게 돌아간다. 하지만 주파수가 높아지게 되면 회절성이 약해진다. 자동차가 빠르게 달릴 수록 눈 앞의 장애물을 더 피하기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다. 즉, 저주파보다 고주파는 더 멀리 안전하게 전파를 보내기 위해 기지국을 더 많이 세워야 한다. 망투자비도 올라간다.

경기도 광명시에 사는 회사원 이우진(33세)씨는 간단하게 PCS에 대해 설명 듣고 “고등학교 때 PCS를 처음으로 샀는데, 전철을 타거나 지하에 위치한 오락실에 들어가면 PCS가 잘 안터졌다”며, “같이 간 친구는 011을 써서 그런지 나보다 잘 터졌었다”고 말했다.

▲ PCS와 셀룰러 및 CT-2 주요 성능 비교 (자료 : LGU+)

물론 PCS만의 장점도 분명있다. 1.8GHz 주파수를 이용하기 때문에 13Kbps 음성신호변환장치를 사용해 통화품질이 셀룰러 보다 탁월했다. 데이터 전송속도도 14.4Kbps로, 9.6Kbps의 속력을 내는 셀룰러보다 약 2배 가량 빨랐다. 게다가 신규 사업자로 진입한 PCS 사업자의 고군분투로 더 경제적인 소비가 가능했다는 점도 경쟁력으로 지목됐다.

이렇듯 PCS 사업자들은 우수한 통화품질과 저렴한 가격, 더욱 소형화된 단말기 등에 힘입어 급격하게 성장했다. PCS가 상용화된지 3개월만에 100만 가입자를 돌파했다. 전체적인 이동통신 시장에도 활기가 찾아왔다. PCS 상용화 7개월 만인 1998년 5월에는 이동통신 가입자 수가 500만 명을 돌파했고, 이후 1년 7개월만에 1000만 명 가입자를 돌파하기에 이른다.

▲ 다양한 휴대폰이 쏟아져 나왔다. (사진 : 삼성전자)

하지만 이러한 급격한 성장에도 불구하고 이동통신 시장은 내부적으로 그만큼의 아픔이 따랐다. 서로가 가입자를 유치하기 위해 치열한 마케팅 전쟁을 벌인 결과다. 소비자 입장에서는 높은 품질의 서비스를 저렴한 가격에 사용할 수 있어 휴대폰 대중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지만, 반대로 사업자들은 출혈경쟁이 계속되면서 수익악화로 이어졌다. 양날의 칼로 현재까지도 주목받는 ‘보조금’도 이 때부터 본격화됐다.

당시 정부의 규제가 없었기 때문에 보조금 수위는 1998년말 기준 국내 5개 사업자의 매출액 대비 평균 44%에 이를 정도였다. 새롭게 진입한 PCS 사업자들은 이보다 더한 출혈을 동반해야만 했다. 총 가입자 300만 명을 돌파했을 때 PCS 3개 사업자는 적자를 면치 못했으며, 매출액보다 보조금 수위가 더 높아지는 경우까지 발생했다.
 

▲ 매출액 대비 단말기 보조금 지급 비율(1998. 1-11, 단위 : 억 원,%) (자료 : LGU+)

1998년 보조금 지급 비율을 살펴보면 셀룰러 진영의 SK텔레콤은 2조6885억원의 매출액 중 보조금이 4800억 원으로 17.8%를 차지했으며, 신세기통신은 6893억 원의 매출에서 52.7%인 3637억 원을 보조금에 쏟아부었다. PCS 사업자의 경우 한국통신프리텔(KTF)는 5675억 원의 매출 중 93.7%인 5320억 원을 보조금으로, 한솔PCS는 4216억 원에서 52.1%인 2200억 원을, LG텔레콤은 매출액 4445억 원보다 높은 5219억 원을 보조금에 투입했다.

결국 정부는 1992년 2월 ‘이동전화 공정경쟁 지침’을 내리고 5개 사업자가 이를 합의하도록 유도했다. 당시 보조금 지급 상한선으로 15만 원이 책정됐으며, 2000년에는 보조금 지급 완전 폐지로 이어졌다.

▲ 당시 삼성 애니콜이 국내 시장 점유율을 절반 이상 끌어올린 바 있다. (사진 : SKTworld 블로그)

이후에 IMT-2000 사업자 선정을 앞두고 대대적인 인수합병이 시작되면서 5개 사업자는 3개 사업자로 축소됐다. SK텔레콤은 1999년 12월 신세기통신을 합병하면서 압도적인 점유율을 가져가게 됐으며, 한국통신프리텔은 2000년 6월 한솔PCS를 인수하면서 내일을 기약했다. 이후에는 사명을 KTF로 바꾸게 된다. LG텔레콤과 함께 3개 사업자 시대로 바뀌었다.

모토로라 벽 뚫고 나온 국산폰 경쟁 본격화
1984년 국내 휴대폰이 처음 등장한 이후 항상 1등은 미국의 모토로라였다. 마치 견고한 성벽을 쌓은 듯이 모토로라는 넘어설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무모한 도전을 감행한 곳은 삼성전자였다. 당시 삼성전자는 1986년 국내 최초 카폰인 ‘SC-1000’을 내놓기도 하는가 하면, 1988년 서울올림픽에 맞춰 휴대전화 SH-100을 선보이기도 했지만 별다른 재미를 보지 못했다.

▲ 이통시장은 10여년간 모토로라가 강세를 보였다(사진 : 모토로라)

삼성전자는 실패를 거울삼아 문제점을 개선하고 제품을 소형화시킴과 동시에 자체 개발 안테나를 채택해 통화 성공률을 높인 SH-770을 1994년 10월 내놓는다. 이 때 첫 등장한 브랜드가 바로 ‘애니콜(anycall)’이다. ‘한국지형에 강하다’라는 슬로건에서도 알 수 있듯 애니콜 브랜드로 출시된 SH-770은 한국인의 체형과 한국의 특수한 지형구조에 맞게 부피를 줄이고 통화 성공률을 끌어올리면서 큰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결국 삼성전자는 1995년 8월 마침내 51.5% 국내 점유율을 차지하면서 모토로라를 제치고 정상에 올라섰다.

이 때부터 삼성전자의 공격적인 행보가 이어졌다. 특히 CDMA와 PCS의 상용화는 삼성전자의 양날개 역할을 톡톡히 담당했다. 삼성전자가 생산한 최초의 CDMA 디지털 휴대폰인 SCH-100은 무게 175g의 슬림함과 117개의 CDMA 관련 특허를 출원한 기술을 채택해 어디서나 깨끗한 통화품질을 보여줬다.

▲ 밀리언셀러를 달성한 삼성 폴더폰(사진 : 삼성투모로우)

국내 시장에서의 성공을 발판으로 삼성전자는 CDMA 셀룰러 휴대폰과 PCS 수출시장 개척에 힘을 쏟았다. CDMA 셀룰러 휴대폰 수출은 1997년 초 퀄컴의 단말기를 채택하고 있는 홍콩의 허치슨에 SCH-100과 SCH-200을 수출하면서 시작됐다. 자연스럽게 중국 시장까지 진출한 삼성전자는 이후 미국에서 1997년 한해동안만 45만 대의 판매량을 올리면서 시장점유율 8%로 올라서는 성과를 얻어냈다.

이에 맞서는 LG전자도 1996년 2월 CDMA 휴대폰인 ‘LDP-200’을 내놓으면서 삼성전자와의 본격적인 경쟁 구도를 구축했다. 1997년에는 ‘도시 지형에 강하다’는 슬로건으로 ‘귀족의 자제’라는 의미를 지닌 ‘싸이언(CION)’ 브랜드를 론칭한다. 지금은 휴대폰을 제조하지는 않지만 현대도 ‘걸리버’라는 브랜드를 통해 휴대폰을 내놓은 바 있다.

이후 걸리버는 뚜렷한 성과없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LG ‘싸이언’은 2011년 3월 브랜드가 ‘LG 모바일’로 바뀌면서 자연스럽게 소멸됐다. 애니콜은 피처폰으로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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