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은 만든 사람의 것이라기보단 그 음식을 맛본 사람의 것입니다. 저마다 음식을 대하는 자세가 다르고 입맛도 천차만별입니다. 저도 수많은 음식의 소유자들 가운데 한 명일 뿐이어서 근엄한 자세로 후기를 남기기 꺼려집니다. 고민 끝에 생각해 낸 묘수가 농담입니다. 기자라고 해서 언제나 도학자처럼 정숙한 태도로 밥을 먹진 않으니까요. 닭 한 마리 주문해도 서로 다리 먹으려고 승강이 벌이는 각박한 세상입니다. 음식을 앞에 두고 농담 몇 마디 건네다 보면 잠시나마 각박함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요. 저와 농담 몇 마디 나누지 않으시렵니까?<편집자주>

신민경 기자.

[디지털투데이 신민경 기자] 초등학교에 막 입학한 2003년 10월 심의 '감자면'이 나왔다. 신묘한 쫄깃함을 맛보고 충격을 받았다. 중학교에 입학해서는 라면 중에서 그것만 먹었다. 고등학교에서 보낸 3년도 감자면과 함께였다. 고등학교 마지막 학기 땐 내 앞줄에 앉았던 친구가 '감자면 마니아'인 것을 알게 됐다. 우리는 음식 취향뿐만 아니라 마음도 꼭 맞았다. 야간자율학습을 하다보면 뱃속에서 구라파전쟁이 벌어질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친구는 뒤돌아보며 "감자면할래?"라고 물었다. 운동장 끝에 마련된 정자는 우리들의 아지트였다. 봉지째 뜨거운 물을 담아 끓인 '뽀글이 감자면'를 나눠 먹으며 추억을 쌓았다. 이처럼 우리에게 감자면은 줄곧 동사 같은 존재였다. 값이 비싸서 '감자면하다'란 동사를 매일 사용할 순 없었지만 말이다.

학창시절을 함께 했던 감자면이 지난 6일 컵라면으로 출시됐다. 성인이 됨과 동시에 감자면에 대한 기자의 충성심은 점성을 잃었다. 하지만 어릴적 '죽자고 좋아했던' 라면의 반가운 소식에 바로 편의점으로 달려갔다. 죽어있던 내면의 '감자면 세포'들이 깨어난 듯했다.

(사진=신민경 기자)
(사진=신민경 기자)

감자면 컵라면인 '감자면큰사발'은 편의점에서 개당 1600원에 판매되고 있다. 구매한 컵라면의 표시선까지 뜨거운 물을 담고 전자레인지에 넣어 2분 조리했다. 끓는 물만 넣고 4분 기다려도 되는데, 더 완벽한 '감자면'을 먹고 싶어 전자레인지도 동원했다. 먹기 전에 감자면 용기에 적힌 문구를 읽었다. 면의 40%가 감자전분으로 이뤄졌으며 스프류 가운데 8%는 감자라고 한다.

결론을 먼저 말하자면 컵라면은 봉지라면의 맛만 못하다. 하지만 최대한 충실하게 담아내려고 한 노력만으로도 가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비주얼은 성공적이었다. 반들반들한 면발에서 윤기가 도는 게 시각적으로 꽤나 먹음직스럽다. 감자면만의 바로 그 반투명한 면발이다. 실제 식감도 쫄깃하고 부드럽다. 겉모습과 식감만으로 따지자면 봉지면의 면질을 그대로 재현한 듯하다.

하지만 문제는 면발에 힘이 없다는 점이다. 젓가락으로 살짝만 집어도 툭툭 끊긴다. 봉지라면의 매력은 '가늘고 쫄깃한 면발'이었다. 그런데 이런 장점을 컵라면으로 옮기니, 가뜩이나 가는 '컵라면용' 면발이 더 가늘어진 것이다. 면이 쉬이 끊어지니 쫄깃함을 느끼기도 전에 입 안 곳곳으로 면이 분해됐다.  

국물맛과 풍미는 봉지면의 것과 다를 바 없이 맛 있었다. 조미료와 간장 기반의 국물맛이 짜면서도 고소한 게 혀끝에 지속해서 감칠맛이 돌았다. 그래서 컵라면 내에 동봉됐던 스프 안에 무엇이 있었는지 다시 살펴봤다. 콘소메(스프)맛 분말과 볶음참깨분말, 양지비프스톡분말, 복합조미간장 분말, 덴마크산 호화감자전분이 들어갔다. 참깨분말과 감자전분 덕에 고소함을 느꼈고 조미간장분말 덕에 짠맛을 느꼈던 것이었다. 건표고버섯과 건청경채, 튀김감자들도 귀여운 양과 모습으로 국물에 둥둥 떠 있었다. 새삼 음식엔 인과관계가 뚜렷하단 생각이 든다. '기자의 글도 이 감자면 스프와 국물의 인과관계만큼만 논리적이고 정직하면 더 이상의 소원이 없겠다'는 푸념도 놓아본다.

(사진=신민경 기자)
(사진=신민경 기자)

어쨌든 컵라면 뚜껑면의 설명에 따르면 이 국물은 '진하고 칼칼한 샤브샤브맛'이라고 한다. 진한 샤브샤브 국물맛인 점엔 십분 동의하나 칼칼하단 점엔 공감할 수 없었다. 본래 감자면 봉지면의 국물은 꽤 맵다. 오뚜기 진라면 매운맛의 국물보다도 훨씬. 하지만 컵라면 용기 속 국물에선 얼큰하고 칼칼하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기자는 보통 컵라면의 남은 국물에도 밥을 말아 먹는 편이다. 하지만 이 경우엔 면을 후루룩 다 먹고 나니 국물이 여의치 않아 마시기만 했다.

감자면과 약 10년을 함께한 마니아로서 품평하겠다. (감자면 컵라면을 먹은 후 정확한 평가를 위해 감자면 봉지면을 새로 사서 먹어봤다. 편의점에서 개당 1200원에 팔고 있었다.) 감자면큰사발, 이 정도면 성공이다. 물론 면발 힘의 부재, 칼칼한 국물맛의 부재 등이 아쉽지만 나름 쫄깃하고 고소한 면발 식감을 잘 옮겨 담은 듯하다. 어른이 된 기자에게 지금의 감자면은 다소 '유치하고 유아스런' 맛이다. 하지만 단 몇분만에 조리한 컵라면으로 지난 학창시절의 소중한 추억을 느낄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기자도 오늘만큼은 체면을 내려놓고 영화 '박하사탕'의 설경구가 돼 본다. 

"나 돌아갈래! 건강 생각 않고 미래 생각 않고 감자면만 봉지째 먹어치우던 그 때로 돌아갈래!"

지난날 친구와 나눠먹던 '뽀글이 감자면'의 맛은 절대 돌아오지 않는다. 때문에 앞으로 기자의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음식 또한 최대한 곱씹으며 음미하겠다고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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