챗GPT가 만든 기사 이미지 [사진: 챗G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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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투데이 이호정 기자] 국내 게임업계에서 신작 출시 연기가 연쇄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완성도 제고'를 내세우지만, 실상은 중국 게임의 기술력 약진으로 높아진 이용자 기대치와 라이브 서비스 시대 초기 실패 시 회복이 불가능해진 구조에 따른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보인다.

◆대형 신작 줄줄이 멈춤…완성도 앞세운 일정 재편

최근 몇 년간 원신을 비롯한 중국산 고품질 게임들이 글로벌 시장에서 큰 성공을 거두면서 한국 이용자들의 기대 수준이 급격히 상승했다. 이들 게임은 높은 수준의 그래픽과 방대한 오픈월드, 정교한 스토리텔링을 기본 스펙으로 제시했다. 과거 모바일 게임 특유의 '빠른 출시→운영 중 보완' 공식이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된 것이다.

박용현 넥슨게임즈 대표는 지난 6월 넥슨 개발자 콘퍼런스에서 "모바일 게임도 새로운 게임이 진입하기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며 "게임 개발이 늦어질지언정 완성도와 팬들의 기대감을 끌어올리는 작업에 집중해야 한다"고 진단했다.

실제로 국내 주요 게임사들의 신작 연기가 도미노처럼 이어지고 있다. 지난 13일에는 펄어비스가 올해 4분기 출시 예정이던 '붉은사막'을 2026년 1분기로 연기한다고 발표했다. 허진영 펄어비스 최고경영자(CEO)는 "첫 트리플A(AAA)급 콘솔 게임 론칭 과정에서 유통, 보이스오버, 콘솔 인증 등 여러 파트너사와의 협업 시간이 예상보다 길어졌다"며 "의미 있는 규모의 성공을 위한 전략적 선택"이라고 설명했다. 

이같은 결정은 최근 업계 전반에서 이어지는 '완성도 우선' 기조와 맞물려 있다. 카카오게임즈는 당초 올해 3∼4분기 출시 예정이던 신작 4종을 내년으로 연기했다. '크로노 오디세이'는 대규모 비공개 베타 테스트(CBT)에서 200만명 가까운 신청자를 모집했지만, 최적화 부족과 기술적 완성도 문제로 이용자들의 지적을 받으며 출시가 미뤄졌다.

엔씨소프트도 당초 올해 예정이던 '브레이커스'를 내년 1분기로, 'LLL'은 내년 중반 이후로, '타임테이커스'는 2분기로 각각 조정했다. 회사는 "게임 개발 상황의 딜레이가 아니라 게임 간 퍼블리싱 일정 충돌을 피하고 완성도를 높이기 위한 재배치"라고 설명했다. 박병무 공동대표는 "게임성 평가위원회와 기술성 평가위원회 체계를 강화해 개발 지속 또는 중단을 과감히 결정하는 방식을 도입했다"고 밝혔다.

크래프톤은 '서브노티카2'의 내부 마일스톤 미달을 이유로 기존 경영진 3인을 교체하며 개발을 내년으로 연기했다. 웹젠도 서브컬처 게임 '테르비스' 출시일을 올해 하반기에서 내년 이후로 미뤘다.

개발 도중 프로젝트가 아예 취소되는 사례도 늘고 있다. 엔씨소프트 분사 자회사 루디우스게임즈는 지난 7일 '택탄' 제작 중단을 결정했고, 넥슨도 지난 4월 '바람의나라 2' 퍼블리싱 계약을 전격 해지했다.

◆첫인상 실패는 치명타…출시 일정 조정의 배경

게임사들이 출시 연기라는 리스크를 감수하는 근본 이유는 라이브 서비스 구조의 특성에 있다. 현재는 출시 후 수년간 지속 업데이트를 통해 수익을 창출하는 모델이 표준이 됐다. 이 구조에서 초기 4~8주 성과는 향후 수년간의 수익성을 좌우하는 결정적 변수다.

다만 반복적인 출시 연기는 투자자 신뢰도 하락이라는 부작용도 낳고 있다. 펄어비스 실적발표에서 한 애널리스트는 "몇 년째 미뤄지고 있어서 신뢰감이 많이 떨어지고 있다"며 "2026년 1분기도 과연 믿어도 되는 건지 궁금하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작년 새롭게 출시된 한국산 게임 중 현재까지 안정적 성과를 유지하는 작품은 넷마블의 '나 혼자만 레벨업: 어라이즈', 스마일게이트의 '로드나인', 111퍼센트의 '운빨존만겜' 정도에 불과하다. 반면 같은 기간 출시된 수십 개 신작은 출시 6개월 내 서비스 종료하거나 매출 급감을 겪었다.

한 업계 관계자는 "한 번 '망작'으로 평가받으면 이후 마케팅 비용이 5~10배 늘어나고, 그래도 이용자 유입이 어렵다"며 "초기 실패를 감수할 바에야 출시를 늦춰서라도 성공 확률을 높이는 게 합리적 판단"이라고 설명했다.

◆완성도 추구와 혁신 사이의 균형 찾기

이번 출시 연기 현상은 국내 게임업계의 개발 철학에 변화 조짐이 나타나고 있음을 보여준다. 과거 '빠른 출시→시장 반응→업데이트 보완' 방식에서 '충분한 검증→완성도 확보→출시' 방식을 고려하는 회사들이 늘어나고 있다.

각 회사의 출시 연기 결정에는 단기 매출보다 장기 IP 가치를 우선시하는 전략적 계산이 깔려 있다. 엔씨소프트가 2026년까지의 신작 일정을 분기별로 분산 배치하는 것도 한 번에 여러 신작을 쏟아내기보다는 각각의 성공 확률을 높여 전체 포트폴리오의 안정성을 확보하겠다는 의도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신중론이 단기적으로는 출시 물량 감소를 가져오지만, 장기적으로는 한국 게임의 글로벌 경쟁력 강화와 브랜드 가치 제고에 기여할 것으로 본다. 특히 중국 게임 수준에 맞는 품질을 확보함으로써 해외 시장에서 한국 게임에 대한 신뢰도를 높일 수 있다는 평가다.

다만 완성도를 추구하다 보면 안전한 장르와 검증된 요소에만 의존하게 될 가능성도 있어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다른 관계자는 "과거에는 일단 내고 보자는 식이었다면, 이제는 한 방에 성공하지 못하면 기회가 없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며 "출시 연기가 늘어나는 것은 업계가 보다 신중해지고 있다는 신호이지만, 혁신적 시도보다는 안전한 선택만 추구할 위험도 있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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