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셔터스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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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투데이 고성현 기자]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한 IT업계 훈풍이 끝나면서 전자·화학에 한파가 찾아왔다. 글로벌 경기침체 우려가 심화되고 소비재 및 IT 전방산업 수요가 크게 줄어들면서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시장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진 모양새다. 

정유·화학산업도 러-우크라 전쟁 장기화에 따른 에너지난 여파로 정제마진이 하락하며 불황 초입에 들어섰다. 전기차를 등에 업은 배터리만이 고속 성장 바람을 탔다.

코로나19로 공급망 위기를 겪은 미국이 본격적인 공급망 재편에 나선 것도 올해 화두다. 반도체, 배터리, 신재생에너지가 그 중심에 있다. 미국은 현지 투자유치와 제조업 본국 회귀(Reshoring)를 위해 반도체와 과학법을 발표한 데 이어 인플레이션 감축 법안(IRA)까지 발효해 배터리·신재생에너지 현지 투자를 이끌어냈다.

이와 함께 반도체 부문은 미국·대만·일본·한국이 중심이 되는 칩4 동맹이 논의되고, 미국기업 첨단 반도체 장비의 중국 수출 금지 등 중국 견제 수위를 크게 높였다. 배터리 부문은 IRA에서 중국, 러시아 등 우려국가의 광물 및 부품 사용을 제한하는 규정을 삽입해 중국 기업의 미국 진출 가능성을 낮췄다.

이천 SK하이닉스 반도체 제조 공장 [사진: 연합뉴스]
이천 SK하이닉스 반도체 제조 공장 [사진: 연합뉴스]

◆수요 줄고, 재고 늘고…겨울 온 반도체, 미국 압박까지

지난해 호황기를 맞았던 반도체는 엔데믹 전환으로 위기에 놓였다. 시스템반도체 부족으로 시작된 공급난이 IT산업 전반 수요 하락과 맞물렸다. 불티나게 팔리던 제품은 어느새 재고로 쌓이는 처지가 됐다. 당초 겨울이 예고됐던 메모리반도체는 시장 수요 하락, DDR5 지원 CPU 연기, 가격 하락세 등으로 빠른 내리막길을 걸었다.

IT 산업 전반에 수요 감소가 일어나자 굳건했던 서버 중심 수요도 꺾였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범용 메모리 제품 하락세에도 데이터센터, 클라우드서버 등 중심 수요가 견조하며 역대급 실적을 써냈지만, 서버업계가 재고 조정에 나서면서 하반기 들어 하락세로 접어들었다.

시스템반도체의 수요도 같은 흐름을 탔다. 상반기는 그동안 수주해온 제품 공급이 이뤄지며 높은 실적을 구현했다. 하지만 IT 수요 감소로 반도체 설계 전문 기업(팹리스)의 주문량이 줄면서 위탁생산(파운드리) 업체들도 하락세를 맞이했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때 아닌 호황을 맞이했던 8인치 파운드리 수요가 급감했고 첨단 공정 중심인 TSMC, 삼성전자의 12인치 공정 주문도 점점 감소하는 추세다.

대외적인 변수도 커졌다. 미국이 공격적인 대중국 반도체 산업 견제를 시작했다. 미국은 그동안 진행해왔던 자국 기업 장비, 제품의 대중국 수출 제한의 범위를 첨단공정 영역까지 확대했다. 한편으로 대만, 미국, 일본 등 주요 기업을 유치하기 위해 '반도체와 과학법'을 만들어 자국 공급망 구축 발판을 마련했다. 올해 초 거론됐던 미국·대만·한국·일본 중심 반도체 동맹인 '칩4'도 그 일환이다.

최근 우리나라는 칩4 참여를 공식화하며 미국이라는 거대한 배에 몸을 실었다. 하지만 최대 수출국인 중국과의 교역을 어떤 식으로 진행해나갈지는 미완의 과제로 남았다. 중국에는 삼성전자의 낸드플래시 메모리 공장, SK하이닉스의 D램 공장이 있다. 미국 장비 반입 유예 기간이 1년 남짓 남은 가운데, 어떤 타개책을 내놓을지 관심이다.

LG디스플레이 파주공장 [사진: LG디스플레이]
LG디스플레이 파주공장 [사진: LG디스플레이]

◆전례 없는 위기 닥친 디스플레이, 내년도 위험

지난해 디스플레이는 코로나19 팬데믹으로 LCD 특수를 누렸다. 올해는 반대다. 엔데믹 전환으로 IT 수요가 급감하고, 중국 중심 패널 업체의 저가 공세로 LCD 패널 판가가 떨어져 업황이 무너졌다. 디스플레이에 대한 전반적인 수요가 감소하자 새로운 먹거리였던 OLED 패널도 TV 시장 등 침투율이 낮아지면서 기대감이 크게 낮아졌다.

디스플레이는 반도체 등 주요 산업에 힘을 실어주기로 했던 국가첨단전략산업 특별법에서도 제외될 뻔했다. 중국 기업의 굴기가 강한 데다, 핵심 산업으로 떠오른 반도체와 배터리 대비 중요성이 부각되지 못한 탓이다. 다행히 OLED, 마이크로LED 등 차세대 디스플레이가 전략산업 분야에 포함되고 세제 혜택 등 방안이 언급되면서 분위기를 바꾼 상황이다.

삼성디스플레이는 빠른 LCD 생산라인 철수 결정으로 실적 선방에 성공했다. 고객사의 신규 스마트폰 OLED 패널 공급에 성공한 점도 한몫했다. 반면 LG디스플레이는 직격탄을 맞았다. 여전히 높았던 LCD 패널 사업 비중으로 실적이 하락했고, 야심차게 준비해온 TV용 OLED 패널마저 수요 감소로 적자 상황에 놓이게 됐다. LG디스플레이는 LCD 패널 사업 종료 계획을 앞당기고, 실수요 기반 패널 생산에 들어가면서 체질 개선에 나섰다.

내년 디스플레이 업황도 불투명하다. 경기침체 우려가 현실이 되고 있는 데다, 실적 선방을 가능케한 소형 OLED 패널 적용처인 스마트폰 등이 비수기에 접어든 탓이다. 태블릿, 노트북 등에 탑재되는 IT용 OLED 패널도 2024년께 활발해질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다만 스마트폰 신제품이 출시되는 하반기부터 다시 상승 기류를 탈 수 있을지 관심이다.

중국 상하이 기가팩토리에서 출하 후 수출 선적 대기중인 테슬라 모델3 [사진: 신화망]
중국 상하이 기가팩토리에서 출하 후 수출 선적 대기중인 테슬라 모델3 [사진: 신화망]

◆침체 우려 뚫고 달린 전기차…배터리는 웃었다

글로벌 경기 침체 우려, 엔데믹에 따른 IT 산업 수요 감소에도 배터리 산업은 고속 성장을 거듭했다. 코로나19로 중단됐던 글로벌 전기차 업체의 가동률이 오르고, 이들의 신차들이 하반기부터 속속들이 등장한 덕분이다. 배터리 3사의 해외 증설 라인이 신규 가동한 점도 실적 상승세에 힘을 보탰다.

LG에너지솔루션은 테슬라 중심 원통형 배터리 매출이 꾸준히 늘어 역대급 실적을 바꿔 나갔다. 2분기 중국 봉쇄 영향으로 다수 주춤했지만,  많은 고객사를 확보한 덕에 배터리 생산 가동률이 견조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3분기 들어서 테슬라마저 생산을 재개하며 분기 최대 실적을 기록했다. 당초 19조2000억원이었던 연 매출 목표를 22조원으로, 다시 한번 25조원으로 올려잡은 배경이다.

삼성SDI는 BMW, 폭스바겐, 볼보트럭 등 기존 고객사 공급이 늘면서 분기마다 최대 매출 기록을 다시 썼다. 지난해 헝가리 괴드 공장에서 양산을 시작한 신규 NCA 배터리인 P5(젠5)의 출하량 확대도 영향을 줬다.

SK온은 상반기 폭스바겐 등 주요 고객사의 차량용 반도체 공급난 영향을 받았지만, 신규 전기차 모델 출시 등으로 적자 폭을 점점 줄여나가고 있다.

지난 8월 미국에서 발효된 IRA는 국내 배터리 업계에 양날의 검으로 다가왔다. 최대 경쟁국인 중국 기업의 미국 진출이 어려워지며 북미 시장 선점에 유리해졌지만, 원소재 공급망의 탈중국화를 서둘러야 한다는 과제도 남았다. 유럽도 유사한 법인 핵심원자재법(CRMA) 제정을 추진하고 있어 공급망 다변화 속도를 높여야 하는 상황이다.

이에 따라 배터리 업계는 칠레, 호주, 캐나다 등지로 원재료 조달처를 확대하며 관련 법안 대응에 나섰다. 협력사인 소재 기업과 완성차 간 협력을 확대하고 있다. 그러나 니켈 수급처로 점찍었던 인도네시아가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FTA) 체결국이 아닌 점, 흑연 등 일부 소재의 탈중국화가 어려운 점 등이 위험 요소로 자리 잡고 있다.

TSMC 애리조나 공장을 둘러보는 바이든 대통령 [사진: AP=연합뉴스]
TSMC 애리조나 공장을 둘러보는 바이든 대통령 [사진: AP=연합뉴스]

◆미국에 웃고 운 3대 산업…내년 전망 엇갈려

한 업계 관계자는 "반도체와 배터리는 미국으로 인해 기회를 찾았고, 디스플레이는 미국으로 인해 위기를 맞았다"며 올 한해를 총평했다. 반도체와 배터리 산업은 미국의 핵심 전략 산업으로 분류되며 새로운 기회를 맞이했지만, 디스플레이는 한국과 중국 등 아시아 기업만 영위하는 사업인 탓에 미국의 전략 산업에 편입되지 못했다는 의미다. 이에 따라 내년 산업 전망도 미국의 주도 방향성에 따라 변화할 것으로 전망된다.

최근 반도체 산업은 미국의 주도적인 공급망 재편 정책에 따라 위기감이 커졌다.

삼성전자가 맹렬히 추격하던 대만 TSMC가 미국에 추가 투자를 선언하며 격차를 벌렸고, 파운드리 산업에 진입한 인텔이 자국 기업 및 정부에 힘입어 성장 발판을 마련했다. 삼성전자는 ' 쉘퍼스트' 전략을 바탕을 내세우며 내년 미국 투자를 본격화할 예정이다. 그렇지만 TSMC의 적극적인 미국 투자로 격차 좁히기가 쉽지않게 됐다. 메모리 부문은 최대 수출국인 중국과 주도권을 잡은 미국 사이에서 눈치 싸움이 본격화될 전망이다.

배터리 부문은 위기보다 수혜 기대감이 더 크다. 기술과 안전성을 이유로 배터리 산업이 진입장벽이 높고, 현재 K배터리 3사를 대체할 기업이 일본 파나소닉, 중국 CATL 밖에 없어서다. 더욱이 파나소닉은 테슬라, 토요타 외 배터리 공급망이 여의치 않고, CATL은 IRA로 진입 기회마저 제한된 상황이다.

이 가운데 글로벌 경제가 둔화된 점이 가장 큰 변수다. 산업 전반이 하방세로 접어든 가운데, 기술력은 물론 투자를 위한 기초체력을 갖춘 기업이 살아남을 가능성이 커졌다. 2023년이 미국이란 강자로부터 시작된 '약육강식'의 해로 비춰지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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