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소형 8인치 360도 폴더블 OLED [사진: LG디스플레이]
중소형 8인치 360도 폴더블 OLED [사진: LG디스플레이]

[디지털투데이 고성현 기자] 핵심 부품산업인 반도체와 배터리가 미국과 중국 간 무역갈등 및 공급망 재편 속에 시장 환경이 격변하고 있다. 반도체는 미국 반도체지원법에 따른 투자 기회 확대 및 리스크를 함께 떠안게 됐고, 배터리는 미국 인플레이션 감축 법안(IRA)에 따른 고속 성장의 기회를 얻게 됐다.

반면 디스플레이는 이같은 국가 차원 공급망 재편 구도에 포함되지 못해 잠재력이 약화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중국이 저가 중심 제품으로 국내 디스플레이 업계를 위협하고 있고, 확장현실(XR)에 사용하는 차세대 제품도 일본, 중국 회사들이 치고 나가면서 국내 업체들 경쟁력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미중 갈등·공급망 재편에 웃음 짓는 배터리, 울상인 반도체

반도체는 오래전부터 국가 핵심 산업으로 분류돼 왔다. 마이크로컨트롤러유닛(MCU)·전력반도체(PMIC)부터 중앙처리장치(CPU)·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AP)에 이르는 칩들이 전자기기, 방산 등 핵심 전략산업에 적용되면서 국가 차원에서 반도체가 갖는 전략적 가치는 점점 커지는 양상이다.

그러다 2020년 발생한 코로나19 팬데믹을 계기로 반도체 공급에 차질이 발생하며 각국의 보호무역주의 기조가 더욱 강해졌다. 메모리반도체, 시스템반도체 핵심 생산 기업이 한국, 대만, 일본 등에 집중돼 있어 공급망 분산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기도 했다.

배터리는 탄소중립 기조로 인한 자동차 전동화 추세로 성장성이 크게 높아졌다. 탄소를 배출하는 내연기관 차량 대안으로 전기차가 떠오르고, 실제 상용화에 성공하면서 중요성이 부각됐다. 전기차용 배터리를 안정적으로 양산할 수 있는 기업도 한국, 중국, 일본 등에 한정돼 유럽·북미 등 핵심 권역 내 공급망 구축 요구가 커졌다.

반도체·배터리 산업 중요성을 드러내는 대표적 사례가 미국과 중국 간 무역갈등이다. 이는 2017년 트럼프 미국 대통령 재임 시절 미국이 중국의 특허 침해와 기술력 갈취 등을 문제 삼아 수출에 대한 관세를 부과하면서 시작됐다. 그러던 2021년 새로이 출범한 바이든 행정부가 반도체·배터리·바이오 등 공급망 구축 과정에서 중국을 배제하면서 중요성이 더욱 커지는 모양새다.

이에 따라 국내 반도체 업계는 미국·중국이라는 두 고래 사이에 낀 새우등 처지가 됐다. 양국이 국내 반도체 업계에 끼치는 영향이 큰 상황에서 이제는 특정 국가와만 교류해야 하는 양자택일의 관계에 놓인 것이다. 그동안 우리 반도체 산업은 중국에서 제조와 수출 이점을, 미국에서는 장비 수입 및 지식재산권 교류 등의 이점을 취하고 있었다.

최근에는 미국이 자국 내 공급망을 확보하기 위한 반도체와 과학법(Chips and Science ACT)을 본격화하며 중국 배제 의도를 드러냈다. 미국에 투자하는 기업들에게 보조금을 주는 조건으로 중국 내 생산 능력을 5% 이하로 제한하는 안을 내민 것이다. 이와 함께 미국 첨단 장비 및 제조 기술에 대한 중국 수출을 금지하는 조치를 내리기도 했다. 이로 인해 삼성전자·SK하이닉스는 최대 메모리 생산기지인 중국 공장의 미래 운영 방향성을 정해야만 하는 상황이 됐다.

반면 배터리는 미중 갈등의 수혜를 봤다. 배터리 업계는 기존 글로벌 시장에서 저가 중심인 중국 배터리 기업의 공세를 받아내야 했다. 그러다 미국이 IRA를 발효하면서 자국 내 중국 전기차 배터리 진입을 제한하며 성장에 대한 이점을 얻게 됐다.

반도체와 달리 중국향 수출이 적은 점도 수혜가 된 배경이다. 반도체는 기술 수준 차이로 우리 제품이 중국에 많이 수출됐지만, 배터리는 중국이 전기차 보조금 지급 대상을 자국 부품을 쓴 기업에 한정하면서 시장 진입이 어려웠다.

인플레이션 감축 법안에 서명하는 바이든 대통령 [사진: AP=연합뉴스]
인플레이션 감축 법안에 서명하는 바이든 대통령 [사진: AP=연합뉴스]

패권 다툼에 배제된 디스플레이, 성장성도 답보상태

디스플레이는 이들 산업과 상황이 다르다. 전자기기·전기차 등 첨단산업 핵심 부품으로 동아시아 권역에 생산망이 밀집한 점은 같지만, 기술적 역량 차이나 공급망 형성 구조가 달라 양국 간 무역갈등 여부와는 관계가 없다는 평가다.

반도체와 배터리는 주요국 간 기술격차나 공급 구조가 명확하다. 대만은 첨단 시스템반도체 위탁생산(파운드리), 우리나라는 메모리반도체에서 확고한 기술 격차를 지니고 있다. 두 국가의 공급망에 문제가 발생하면 전세계적으로 영향을 줄 수 있는 위치다. 중국이 메모리, 시스템반도체 분야에서 초미세공정에 진입하지 못한 점도 의미가 크다. 미국 입장에서는 중국의 반도체 기술력 확보를 지연시킬 수 있는 수단이 된다.

배터리는 중국·일본·한국 모두 제조 기술력을 갖추고 있다. 다만 시장 성장성에 비해 공급력이 낮은 탓에 공급자 우위 시장(Sellers Market)이 형성돼 있어 권역별 공급망 구축이 요구되고 있다. 또 리튬, 니켈 등 희소한 원재료를 중국이 독점하고 있는 점도 양국 간 무역갈등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반면 디스플레이는 국가 간 기술 격차가 많이 좁혀든 상황이다. 액정표시장치(LCD) 패널은 이미 중국이 저가 공세로 주도권을 잡은 상태고,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패널에서도 기술 격차를 점점 좁히고 있다. 또 반도체처럼 방산과 보안에 쓰이는 핵심 부품이 아니고, 배터리와 같이 미국 핵심 시장의 수익성을 가르는 요소도 아니라 중요도가 떨어진다는 평가다.

이미 디스플레이 패널 생태계가 미국 빅테크 중심 구매 우위 시장(Buyers Market)이 형성된 점도 영향이 있다. 주요 패널 구매자인 애플이 중국, 한국, 일본 등 여러 국가 협력사를 보유하고 있어 가격·공급 협상에 유리하다. 우리 업계 주요 제품인 중소형 OLED 패널 시장에서도 중국 기업들이 진입을 위해 저가 공세를 펼치고 있어, 기술을 따라잡히면 가격경쟁력에서 밀릴 수 있다. 가격이 낮아질수록 구매자인 애플 등에게 유리하기에 굳이 미국에서 중국 디스플레이에 규제를 걸 이유가 없는 셈이다.

메타 퀘스트 VR 헤드셋 [사진: 메타]
메타 퀘스트 VR 헤드셋 [사진: 메타]

OLED 잠식 우려·차세대 기술 경쟁력 의문부호…"전사적 협력 필요"

업계에서는 디스플레이 산업의 성장성이 더 이상 예전같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중국 저가 공세에 맥없이 밀리고 있는 데다, 주요국의 보호산업으로 지정되지도 않은 탓에 중요도가 점점 밀리고 있어서다. 이 상황이 지속되면 OLED 격차도 좁혀지면서 LCD 패널 시장과 같은 전철을 밟게 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차세대 전자기기로 꼽히는 XR용 마이크로 디스플레이 기술 경쟁력에도 의문부호가 찍히고 있다. 이미 중국·일본·미국 기업이 관련 산업에서 양산 제품을 내놓고 있지만 국내 기업은 아직 생산조차 하지 않았다. 당장 XR 시장 규모가 크지 않아 수익성에 큰 영향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향후 XR 시장이 확대된다면 선제적으로 진입한 기업들에게 밀려 차세대 경쟁력에서 밀릴 우려가 있다.

국내 디스플레이 업계가 차세대 기술에서 경쟁력이 밀리게 된다면 경제에 미치는 여파도 적지 않다. 디스플레이 산업이 우리 주요 수출품으로 자리 잡고 있는 탓이다. 지난 달 우리 디스플레이 수출액은 12.3억달러로 주요 15대 수출품목 중 7위에 해당하는 규모를 갖추고 있다. 지난해 기준으로는 우리 수출의 3.1%를 차지하고 있다. 업계에서 디스플레이 생태계 발전을 위한 지원과 협력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배경이다.

업계 관계자는 "우리 기업이 중소형 OLED 패널 등에서 기술 격차를 유지하고 있는 상황이나 장기적으로는 중국 기업에 따라잡힐 수 있는 상황"이라며 "XR 시장에서도 소니, BOE 등이 주도하고 있어, 업계는 물론 정부 차원에서의 협력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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