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개월 전, 일본 캐논 본사의 제품설계담당 임원과 고객지원팀장이 우리나라를 방문해 국내 디지털카메라 커뮤니티 회원 10명과 간담회를 가졌다. 캐논의 플래그십 DSLR 카메라인 '1DS 마크3'에 기름이 새는 문제가 발생한 데 따른 소비자 대응 차원에서 이뤄진 것.

이 일은 캐논이 자랑하던 이 제품이 기름이 새는 문제가 있음을 국내 디지털카메라 동호회 SLR클럽(www.slrclub.com/)의 한 회원이 발견하고, 100명에 가까운 다른 회원이 문제제기 과정에 동참해 이 문제를 이슈화 한 것이 발단이 됐다.

처음에 여러 차례 문제제기에도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던 캐논 측은 비슷한 결함이 있는 제품을 보유한 커뮤니티 내 회원들이 모여 이를 이슈화 하는 등 문제가 확대될 소지가 보이자 결국 캐논 일본 본사 직원이 직접 한국을 방문, 해당 제품 소비자를 위한 보상책을 마련하면서 이 문제는 일단락 됐다.

이처럼 각종 IT제품 관련 커뮤니티를 통해 소비자들이 제품이나 기업의 행태를 변화시키는 사례가 늘어가고 있다. 기업이 만든 제품을 구매하고 사용하기만 하던 수동적인 소비자가 직접 제품을 만드는 데 참여하는 것은 물론 제품에 대한 비판이나 조언도 서슴지 않는 능동적 소비자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IT 제품 관련 커뮤니티는 특정 제품에 관심이 많은 소비자들이 모여 해당 제품에 관해 의견을 나누고, 정보를 교환하고, 기업의 제품이나 서비스 정책에 관련된 제안도 하는 장소가 됐다. 몇 명에 불과한 작은 커뮤니티가 점점 힘을 얻으면서 100만명 이상의 회원을 거느린 대형 커뮤니티로 발전해 가고 있는 것은 소비자의 힘이 커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실제 디지털카메라 브랜드별 제품, 리뷰, 구입 및 사용기, 가격비교 제공을 기반으로 한 디시인사이드(www.dcinside.com/)의 경우 운영자인 김유식 씨 개인 사이트에서 출발해 현재 회원수 100만명을 훌쩍 넘는 거대 사이트로 성장했다. 휴대폰 커뮤니티인 세티즌(www.cetizen.com/)이나 디지털카메라 커뮤니티인 SLR클럽 등도 100만명이 넘는 회원을 보유하고 있다.

내비게이션 커뮤니티인 네비인사이드(www.navinside.com/) 육상목 운영자는 "내비게이션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지도는 사용자들에 의해 발전하고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라며 "몇몇 유저들의 강력한 건의와 적극적인 활동으로 인해 그 제품을 사용하는 모든 이들이 편리하게 사용하고 있다. 이는 다른 IT제품도 마찬가지다"라고 말했다.

◇소비자 뭉쳐 기업 감시한다

소비자들은 커뮤니티를 통해 기업을 감시하는 역할을 하며 스스로 소비자 주권을 찾고 있다. 올 초 중소기업 유엠아이디가 야심차게 발표했던 MID(모바일 인터넷 디바이스) 엠북 M1과 관련해, 제품 기능은 이상 없지만 마감 상태가 별로 좋지 않다는 의견이 펩피 등 관련 커뮤니티에서 잇달아 불거져 나왔다.

이에 유엠아이디는 소비자들의 불만이 더 커지기 전에 예약판매 했던 500대를 전량 리콜하는 발빠른 조치를 취했다.

<소비자가 개선을 이끌어낸 주요 사례>

기업(종료시기)

문제점

소비자 대응

기업 대응

캐논(`09. 5)

플래그십 DSLR카메라에 기름이 새는 결함.

처음 발견한 소비자가 100명가까운 커뮤니티 회원을 모아 집단 대응.

일본 본사 직원과 소비자 간담회, 기름이 샐 경우 평생 무상 청소 보장 약속.

유엠아이디(`09. 4)

MID 제품 마감상태 불량.

소비자들이 펩피 등 커뮤니티와 카페 등에 사진 등을 올려 문제를 이슈화

전량 리콜.

E사(`07.말)

탑재 주요 부품 내역 과장

한 소비자가 제품을 직접 분해해 솔리드커패시터가 아님을 밝혀냄.

전량 리콜

디지털큐브(`06. 5)

PMP 전자파 기준치 초과.

소비자가 전파연구소에 직접 의뢰. 사실 확인

소비자 간담회, 전량 리콜

당시 유엠아이디 관계자는 "중소기업으로서 쉽지 않은 결정이었지만, 앞을 내다봤을 때 소비자의 신뢰를 쌓는 게 더 중요하다고 본다"며, "제품 기능 뿐 아니라 소비자들이 민감해하는 마감 상태 등도 철저히 신경 쓰겠다"고 밝혔다.

문제를 제기했던 소비자들조차 놀라게 할 정도였던 유엠아이디의 과감한 전량 리콜 조치는 소비자들의 화를 누그러 뜨림은 물론 '소비자의 소리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솔직한 업체'로 각인시키는 긍정적 효과도 낳았다.

지난 2006년엔 디지털큐브의 PMP가 전자파가 기준치를 초과하는 문제를 소비자가 밝혀내기도 했다. 당시 회사 측은 온라인 커뮤니티인 PMP인사이드의 회원이 최초로 전자파 초과 문제를 제기하자 법적대응 움직임을 보이는 등 강경 입장을 보이기도 했으나, 전자파 기준치 초과 문제로 전파연구소로부터 `정보통신기기 사후관리결과 및 처분사전통지'를 받자 제품 리콜과 AS개선책을 내놓았다.

심지어 2007년 말 국내 그래픽 카드 제조사 E사는 자사 신제품에 일반 커패시터에 비해 훨씬 특성이 좋고 가격도 3배가량 비싼 솔리드 커패시터를 썼다고 밝혔다가, PC관련 커뮤니티의 고수(?)가 사실이 아님을 밝혀내, 전량 리콜 조치를 취했고, 이에 따른 기업 이미지 하락과 경제위기까지 겹쳐 부도로 이어지기까지 했다.

제품에 대한 '평생보장'이란 과장되고 애매모호한 문구를 문제삼아 기업의 행동변화를 불러 일으킨 사례도 있다. 보드나라 장홍식 운영자는 "'평생보장'이란 게 회사입장이선 제품을 기준으로 한 것이기 때문에 한 마디로 단종되면 AS도 끝난다는 말이지만, 소비자들은 자신이 살아있어서 제품을 쓰는 순간까지를 뜻하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서로 이해하는 게 다르긴 하지만, 기업이 이같은 부분을 명확히 밝혀 놓지 않은 것은 문제"라고 지적했다.

보드나라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한 많은 소비자들이 이같은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해당 기업은 사용 단어에 대한 명확한 정의를 규정하게 됐다.

◇ 소비자단체 놔두고 커뮤니티 찾는 이유는...
기존 소비자보호원이나 소비자관련 민간단체들이 있는 데도 네티즌들이 커뮤니티를 통해 불만사항 등을 제시하는 이유는 뭘까?

"IT제품은 특성에 민감하다. 멀쩡한 제품인데 내 컴퓨터에 꽂으면 작동하지 않고 다른 컴퓨터에 꽂으면 작동하는 등 규정만으로 판단할 수 없는 애매한 일이 비일비재하다. 그 때문에 업체에 반드시 책임지라고 요청할 수 없는 사안들이 많은 게 사실이다."

보드나라의 장홍식 운영자는 이처럼 '법과 제도'가 커버하지 못하는 미세한 부분을 커뮤니티를 통해서 해결할 수 있기 때문에 소비자들이 커뮤니티를 찾는 것이라고 풀이한다. 이런 사안일지라도 충분한 근거를 갖고 커뮤니티에서 공론화 시킨다면 기업 입장에서 외면할 수만은 없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캐논 제품 결함을 처음 발견했던 천정현 씨도 "법에 호소한다고 해도 소비자가 이길 수 있는 방법이 많지 않고, 이기더라도 시간적, 경제적으로 상처뿐인 영광이 될 소지가 크다"며 "커뮤니티에서 계속 화제거리가 되도록 관련 내용을 꾸준히 올리는 등의 방법을 사용한다면 소비자 주권을 회복할 수 있는 확률을 크게 높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권재범 펩피(옛 PMP인사이드)운영자는 "커뮤니티를 통해 소비자들이 기업을 비판하는 것은 집단의 힘을 빌어 기업을 움직일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라고 말했다.

◇기업도 커뮤니티에서 배운다
그렇다고 기업과 커뮤니티가 일방적으로 감시하고 감시당하는 불편한 관계만 있는 것은 아니다. 소비자의 다양한 의견을 가감 없이 들을 수 있기 때문에 소비자들에게 '먹히는' 제품을 만들거나 각종 정책을 추진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고 기업 관계자들은 말한다.

캐논코리아 관계자는 "커뮤니티를 항상 모니터링 한다"며 "이를 통해 국내 진출 초기 방문 AS만 가능했던 것을 택배로도 할 수 있게 했고, 소비자센터에만 전화하면 항상 통화중이라던 소비자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인력이나 장비를 늘리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다"고 말했다.

니콘이미징코리아 관계자도 "실제로 SLR클럽 등 카메라 관련 커뮤니티에 올라온 글들을 보면 이런 정책 방향으로 가라는 말을 해 주는 회원도 있다"며, "커뮤니티가 아니고서는 들을 수 없는 글이기 때문에 회의석상에서 그와 관련한 얘기를 나누기도 한다"고 말했다.

◇'비판적 시각으로 걸러 봐야'
반면 커뮤니티 활성화에 따른 부작용도 없지 않다. 무분별하고 명확한 근거 없이 여론몰이에 나서는 경우도 있는 것.

한 IT제품 업체 관계자는 "서비스센터 직원이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관련 커뮤니티에 와전된 글을 올려 놓는 경우도 종종 있다"며 "그 글과 관계된 서비스센터 해당직원이 억울함을 호소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말했다.

SLR클럽 관계자는 "개인적인 감정에 의해 기업이나 제품을 근거없이 비방하거나 이를 통해 업체에게 금전적인 이득을 보려는 소비자도 커뮤니티 내에 존재한다"며 "누군가 커뮤니티 내에 제품이나 기업에 대해 좋지 않은 글을 남겼을 경우, 이 소비자가 블랙 컨슈머인지 화이트 컨슈머인지 구별해 내는 능력도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기업의 감시자 역할이든 올바른 정보를 취득하기 위한 목적이든 커뮤니티에 소비자들이 모인 이유는 행복한 IT소비를 위해서다. 정당한 소비자 권리를 찾기 위한 본연적인 활동과 함께 '비판의 정당성'을 가리는 노력이 더해질 때, 소비자 주권을 찾고 IT제품과 기업도 발전시키는 선순환 구조의 촉진자로서의 커뮤니티들의 입지도 한층 빛을 발하게 될 것이다.

<인터뷰> "커뮤니티에선 기업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여주죠"
캐논 제품 결함 지적한 SLR클럽 천정현 씨

"커뮤니티에서 활동하는 사용자들은 기업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그들이 모여서 한 목소리를 낸다면 기업을 충분히 변화시킬 수 있죠."

커뮤니티의 힘에 대해 이같이 설명하는 디지털카메라 동호회 SLR클럽의 회원 천정현씨는 그 스스로가 이를 실천한 주인공이기도 하다.

천씨는 DSLR(렌즈교환식) 카메라에서 세계 1위를 차지하고 있는 캐논의 플래그십 제품인 1D 마크3의 제품 결함에 대해 처음 알아내고 커뮤니티 회원들을 모아 캐논과 세 달간의 '투쟁'을 벌여 결실을 얻어냈다. 회원들의 사실을 바탕으로 한 끈질긴 '어필'과 '여론화'에 결국 일본 캐논 본사 기술 담당 직원이 한국을 찾아 해결책을 내놓은 것.

"캐논 측에서 내놓은 해결 방안이 100%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커뮤니티의 힘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만족합니다."

천정현 씨는 국내 소비자들이 다른 나라 소비자들 보다 자신이 구입한 제품에 대해 관심이 많고 날카로운 지적도 서슴지 않는다고 밝혔다. "IT제품이든 뭐든 한국 소비자가 제일 까다롭습니다. 이번에 캐논 제품에서 기름이 새나온다는 것을 알렸을 때 미국이나 유럽 쪽 반응은 '닦아 쓰면 되지'였거든요."

국내 소비자들이 제품의 결함 등에 특히 민감한 이유에 대해 그는 "개인 사용자가 많은 국내 소비자의 특성에 있다"고 설명했다. 카메라를 업으로 하는 사람은 의외로 카메라 기종에 민감하지 않지만 국내 소비자들은 보통 취미로 카메라를 즐기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민감한 정도가 더 크다는 것. 칫솔에 감정을 이입하지는 않지만, 취미로 갖는 물건에는 애정을 쏟기 때문에 불량이나 결함으로 문제가 생기면 격한 반응이 나온다는 풀이다.

이번에 커뮤니티를 통해 거대 글로벌 기업과 한판승부를 벌였던 천 씨. 그는 이번 결과에 대해 충분히 만족하지는 못하지만 불매운동까지 생각했던 것을 멈췄다.

"저와 커뮤니티가 불매운동을 하려했던 이유는 기업을 압박해 해결책을 이끌어냄으로써 우리 뿐 아니라 다른 사용자들도 불편함을 느끼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지만 캐논 카메라 사용자 중엔 이번 문제에 대해 고통 받지 않는 사용자도 분명히 있습니다. '과연 우리 몇 십명이 불매운동을 하는 것이 제품을 잘 사용하고 있는 다른 사용자를 행복하게 하는 것일까?'라는 생각이 들었죠. 어차피 행복한 소비자가 되기 위해 커뮤니티에서 함께 힘을 모으는 건데 괜히 다른 소비자들을 불편하게 해서는 안 되잖아요."

저작권자 © 디지털투데이 (DigitalToday)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