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각은 신의 선물’이라는 말이 있다. 도무지 잊을 수 없는 고통과 슬픔도 시간이 지나면 치유될 수 있다는 의미다. 하지만 디지털 세계에는 망각이란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잠깐 잊는다 해도 그 기록은 영원토록 남게 된다. 문제는 기억 속에 묻어 두었던 부끄러운 과거들이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공개될 수 있다는 데서 발생한다. 이곳 저곳 돌아다닐 필요 없이 클릭 한 번만으로도 개인의 흔적들을 손쉽게 찾고 더 나아가 이를 다수의 사람에게 전파할 수 있는 세상이 도래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배경에서, 온라인 상에 떠다니는 개인의 과거 흔적이 다른 사람들에게 공개되지 않도록 보장하는 권리, 즉 ‘잊힐 권리(Right to be forgotten)’ 법제화가 전 세계적으로 가속화되는 추세다. 인터넷에서 생성, 저장, 유통되는 개인의 정보에 대한 권리를 요구할 수 있도록 보장함으로써, 개인의 명예를 훼손하고 사생활을 침해할 수 있는 정보들이 무분별하게 유포되는 것을 방지하겠다는 것이 주요 골자다. 특히, 최근에는 개인의 신상 정보를 온라인 상에 공개하고 이를 퍼뜨리는 일명 ‘신상 털기와 퍼 나르기’ 피해 사례가 속출하고 있는 만큼, 이에 대한 법제화 요구가 더욱 높아지는 상황이다.

▲ 고운 컨설턴트

하지만 한편에서는 잊힐 권리가 입법화되는 경우, 인터넷으로 대변되는 표현의 자유, 즉 대중의 ‘알고 기억할 권리’를 침해할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본 법안이 과거 행적을 감추는 신분 세탁에 악용되거나 정보 비공개에 의해 추가적인 피해가 발생할 가능성도 있는 만큼, 좀 더 신중한 접근이 요구된다는 얘기다. 부정부패 연루 사건, 범죄 전과, 의료 사고 기록 등이 대표적인 예로, 실제로 올 초 일본에서는 3년여 전 원조교제를 한 혐의로 체포된 한 남성이 자신의 사법처리 기사를 구글에서 삭제해달라고 요구한 가처분 신청을 지방 법원이 받아들여 논란이 된 바 있다.

이와 같이 잊힐 권리를 둘러싼 논의와 대립이 계속되는 가운데, 세계 국가들은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우선시하는 유럽 국가와 표현의 자유를 중시하는 미국을 중심으로 잊힐 권리 법제화에 대해 양분화 된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가장 먼저 잊힐 권리의 입법화에 나선 곳은 개인의 사생활을 중시하는 유럽 국가들이다. 2012년 초 유럽연합 진행위원회는 개인과 법인을 포함한 유럽연합(EU) 전체 회원국을 대상으로 잊힐 권리 보장과 개인정보의 제3국 이전 규제를 주요 골자로 하는 ‘개인정보보호규칙(Data Protection Regulation)’을 제정하여 ‘잊힐 권리’ 확보에 힘을 실었다. 주목해야 할 점은 ‘잊힐 권리’ 대상에서 언론 기사가 제외되었다는 사실이다. 본 규칙이 사회의 감시자인 언론의 역할과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는 의도로 악용될 수도 있다는 판단에서다.

미국은 유럽 국가들과는 달리 잊힐 권리 법제화에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미국이 표현의 자유에 힘을 싣는 가장 큰 이유는 페이스북, 유튜브, 트위터, 링크드인 등 세계적인 SNS 기업 대다수가 미국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데서 기인한다. 즉, 미국 정부가 잊힐 권리를 적극적으로 지지하여 법제화에 나설 경우, 자칫 자국의 기업들이 국내외에서 대규모 소송에 휘말릴 가능성이 높은 까닭이다.

■ 우리나라, 잊힐 권리 입법화 뜨거운 이슈

세계 최고의 인터넷 강국인 우리나라에서도 잊힐 권리 입법화는 단연 뜨거운 이슈가 아닐 수 없다. 올해 3월 방송통신위원회가 ‘인터넷 자기게시물 접근배제요청권 가이드라인’ 초안을 공개하고, 수정 및 보완을 거쳐 6월 중 시행하기로 밝힘에 따라, 잊힐 권리를 둘러싼 논쟁은 한층 가열화되고 있는 상황이다.

가이드라인의 핵심인 ‘인터넷 자기게시물 접근배제요청권’은 표현 그대로 사용자가 직접 작성한 게시물에 대해 타인이 볼 수 없도록 요청하는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 목적이다. 가이드라인에 따르면, ▷회원 탈퇴ž계정 분실 등으로 사용자가 직접 자신의 게시글을 삭제하는 것이 어렵거나, ▷게시판 관리자가 삭제 권한을 제공하지 않아 사용자가 직접 삭제할 수 없고, ▷사용자가 작성한 게시물에 댓글이 달려 게시물 삭제가 어려운 경우에는 해당 게시물에 대한 접근배제 요청을 할 수 있다.

본 가이드라인에 따르면, 접근배제 요청을 받은 게시판 관리자와 포털 서비스 사업자는 접근배제 여부 판단과 사용자 본인 확인을 거쳐 조치를 취해야 한다. 원문은 그대로 놔 두되 해당 게시물을 열어봐도 내용을 볼 수 없도록 ‘블라인드’ 처리를 하고, 검색 사이트에서 검색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단, 접근배제 요청에서 제외가 되는 게시물도 있다. 다른 법에 따라 삭제가 금지되었거나 공익성이 높은 내용을 담고 있는 게시물로 법원이 증거 보전 조치하도록 결정한 게시물, 언론 기사 혹은 공직자가 작성한 게시물이 그 대표적 예이다.

본 가이드라인 관련, 많은 업계 전문가들이 다양한 의견을 내 놓고 있지만, 기술적, 정책적인 부분에서 좀 더 보완이 필요하다는 데는 대다수 동의하고 있다. 현재 가장 이슈가 되고 있는 부분들은 다음과 같다.

우선적으로 이슈가 되는 부분은 게시물에 대한 접근배제를 요청하는 사용자 본인에 대한 체계적인 확인 절차 확보 여부다. 현행 정보통신망법 상, 서비스 사업자는 사용자가 서비스를 탈퇴할 시 해당 개인정보를 복구 및 재생할 수 없도록 파기하도록 되어 있어, 나중에 해당 사용자가 사업자에게 본인 확인을 요청해도 이를 입증할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다.

이에, 사용자 스스로 작성자가 자신이라는 사실을 알릴 수 있는 객관적 자료를 서비스 사업자에게 제출하도록 하고 입증자료가 불충분할 시에는 사업자가 접근배제 요청을 거부할 수 있도록 가이드라인이 보완되었으나, 사용자 요청이 들어왔을 때 작성자를 확인하는 절차의 어려움은 여전히 남아있는 것이 사실이다. 본인 확인이 철저히 이뤄지지 않는다면 타인의 게시물을 자신의 게시물이라 주장하여 접근배제를 요청하는 부작용이 발생할 수도 있는 만큼, 좀더 세부적이고 구체적인 본인 확인 프로세스가 마련되어야 할 것으로 보여진다.

■ 개인의 '잊힐 권리'인가 vs 표현의 자유인가

또한, 타인이 올린 게시물에 사용자에 대한 내용이 포함된 경우도 따져 보아야 한다. 현재 안에 따르면, 사용자는 자신이 올린 게시물에 한해 접근배제 신청을 할 수 있고, 타인이 올린 글이나 사진, 동영상은 차단할 수 없다. 그러나, 개인의 사생활을 침해하는 게시물 중 상당수가 제3자가 작성한 게시물인 경우가 대부분인 만큼, 사용자 본인이 작성한 게시물로 접근배제 범위를 한정 짓는 것은 개인의 정신적 고통을 경감하기에는 역부족일 수도 있다.

조금 다른 시각에서, 한 사용자가 접근배제 요청을 한 게시물과 관련하여 많은 댓글이 남겨지는 등 이에 대한 정치적/사회적/역사적 여론이 형성된 경우도 생각해 보아야 한다. 해당 게시물에 대한 접근배제 조치가 행해지는 경우, 게시물을 작성한 개인의 잊힐 권리는 지켜질 수 있지만, 댓글을 작성한 사용자의 ‘표현의 자유’와 해당 게시물에 대한 사용자의 ‘알 권리’가 침해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즉, 특정 정보에 대한 접근 차단을 통해 개방성이 생명인 인터넷 상의 소통이 위축될 우려도 분명히 존재한다는 얘기다.

마지막으로, 가이드라인을 실제 수행할 주체인 포털 및 인터넷 검색 사업자에 대한 형평성 문제도 생각해 보아야 한다. 강제 사항이 아닌 가이드라인을 지킬 가능성이 낮은 해외 사업자와 달리, 국내 사업자들은 ‘인터넷 자기게시물 접근배제요청권 가이드라인’에 대해 좀더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접근배제 조치를 취하기 위해서는 추가적인 인력과 비용 투입이 필요한 만큼, 가이드라인을 적극적으로 따른 국내 사업자가 더 많은 부담을 지는 역차별을 당할 수도 있다는 의미다.

지금까지 잊힐 권리를 둘러싼 최신 동향에 대해 알아보았다. 디지털 세상에서 생산되고 축적되는 정보에는 유통기한이 존재하지 않는 만큼, 인터넷 세상에서 활동하는 사용자들은 환경의 개방성을 고려하여 보다 신중한 판단을 내릴 필요가 있다고 보여진다. 한 개인이 올리는 게시물로 인해 개인은 물론 타인에게 발생할 수 있는 피해의 심각성을 인지하는 동시에, 개인의 ‘알 권리’와 ‘표현의 자유’가 침해되는 일은 없는 지 따져보아야 한다는 얘기다.

잊힐 권리와 표현의 자유 사이에 있는 올바른 균형점, 그 균형점을 찾기 위한 노력은 계속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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