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셔터스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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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수 IT칼럼니스트]군 제대와 대학 복학을 앞둔 1997년 겨울, 한국 정부가 IMF(국제통화기금)에 구제금융을 신청하면서 전대미문의 외환위기 사태는 시작됐다. 이후 많은 이들이 겪어보지 못한 가혹한 고통 속에서 생존을 위한 사투를 펼쳐야 했다. 적어도 2001년 8월 23일, IMF 관리 체제에서 벗어나 경제 주권을 되찾을 때까지. 아니 오늘날까지 그렇다.

IMF 체제 동안 수많은 기업이 도산하고, 대규모 실업이 발생했다. 구제금융 조건으로 급격한 금리 인상, 노동시장 유연화와 비정규직 증가, 소득격차에 따른 불평등을 심화했다. 졸업을 앞둔 대학 동기 중 정규직으로 취업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갑작스러운 부모의 실업 혹은 사업 파산으로 가족이 해체되는 경험도 이때 처음 겪었다. 나를 포함해 주변 모두에게 있어 생애 가장 우울한 시기였다. 

IMF 사태로 인해 진리처럼 여겼던 ‘평생직장’이라는 개념이 사라졌다. ‘직장인의 시대는 가고 직업인의 시대가 왔다’라는 말이 나왔다. 이전의 고도성장기에는 대학만 나오면 원하는 회사에 취업했다. 정년 때까지 안정적으로 다닐 수 있다고 믿었다. 이제는 어느 직장에 몸담고 있기보다 무슨 일을 하느냐가 중요해졌다. 개개인은 생존을 위해 불가피하게 적대적 역량이 필요했다. 개인의 노력에 대한 결실이 온전히 이뤄지지 않을 수 있다는 현실에 직면했다.

그때 이후 지금까지 상시적 실업과 노동 시장의 유연성이 높아짐에 따라 일시적인 계약 형태로 일하는 긱 워커가 늘어났다. 때마침 기술 혁신에 따른 디지털 플랫폼이 등장함에 따라 안정적인 정규직에서 소외된 많은 노동자가 긱 이코노미에 편입됐다. 

최근 디지털에 익숙한 세대는 긱 이코노미를 더 선호하기도 한다. 코로나19 이후 원격 근무가 보편화되고, 업무 시간과 장소에 대한 유연성과 자율성을 추구하는 사람도 많아졌다. 워라밸과 같이 직장보다 개인적인 가치를 중점에 두는 경향도 높아졌다. 택배, 음식 배달, 차량 서비스 등 단순노동부터 차별화된 전문 역량과 숙련도를 바탕으로 고소득을 얻는 슈퍼 프리랜서까지 등장했다.

물론 대부분 긱 워커는 불안정한 노동 시장과 임금 하락에 따른 생계를 위한 몸부림이다. 2022년 국제노동기구(ILO)는 코로나19와 이후 벌어진 고물가 상황이 전 세계적으로 실질 임금을 하락시켰고, 소득 불평등과 성별 임금격차는 더 심해졌다고 평가했다. 이에 소득을 보충하기 위한 부업의 필요성이 증가했다. 고용주와 근로자의 관계가 일대일이 아닌 일대다 관계가 됐다. “투잡, 쓰리잡을 한다”는 자조적인 말이 일상이 됐다.

지난해 미국에서는 기술 분야를 중심으로 10년 만에 최대 규모의 감원 사태가 발생했다. 올해도 그 여파가 이어지고 있다. 국내도 예외가 아니다. 한국을 대표하는 기술 기업인 네이버, 카카오도 2020년 이후 인력을 처음 줄였다. 여기에 더해 일자리를 빼앗을 수 있는 생성 AI의 등장으로 기술 업계 종사자의 앞날은 더 암울할 것으로 전망된다.

AI가 부상하면서 정규직 인력 채용에 대한 분위기가 더욱 냉랭해졌다. 생성 AI가 나오면서 기업은 이 혁신 기술에서 앞서 나가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AI 관련 직무를 채용하는 데 주력한다. 동시에 비용을 관리하고, 사업 수익성을 유지하기 위해 AI와 무관한 영역은 축소한다. 실제로 여러 기술 기업은 개발자를 AI로 대체하는 것을 고려하고 있다. IBM과 브리티시텔레콤(BT) 그룹은 최근 일자리 감축을 발표하면서 AI를 언급했다. 비단 기술 영역만이 아니다. 여러 전문가는 AI가 사무직 일자리를 위협하고 있고, 특히 중간 능력 업무를 자동화할 가능성이 높다고 밝혔다.

(좋은 현상이라고 단언할 수 없지만) 긱 이코노미는 사회와 시장에 미치는 영향을 점차 확대하고, 성장을 더 가속할 것이다. 2022년 통계청 조사를 기준으로 보스턴컨설팅그룹(BCG)이 조사한 것에 따르면 국내 전체 취업자 2,600만 명 중 약 1,000만 명(39%)이 긱 워커인 것으로 파악됐다. 특이한 점은 이들 중 88%가 계속해서 긱 이코노미에 종사하고 싶다고 응답했다. 60%는 정규직 직업을 가져도 마찬가지라고 답했다. 미국의 경우 시장조사기관 스태티스타(Statista)는 약 6800만명 근로자가 긱 워커로 일하고 있으며, 2028년까지 미국 내 근로자의 50%가 훨씬 넘을 것으로 예측했다. 맥킨지는 2025년까지 긱 이코노미가 창출하는 부가가치는 전 세계 GDP의 2%에 해당하는 2조 7,000억 달러에 이를 것으로 전망했다.

AI를 통해 긱 이코노미는 고용 형태의 주류로 자리 잡을 것 같다. AI는 필연적으로 일자리를 더 쉽게 만들고, 더 경쟁적으로 만든다. 어떤 경우에는 기존 정규직을 쓸모없게 한다. 이전에는 직접 고용했던 개발자, 홍보/마케팅, 고객 서비스 등의 직군을 긱 워커로 대체할 수 있다. 기업은 긱 이코노미를 활용해 운영을 간소화하고, 비용을 절감한다. 미국에서는 이미 48% 이상의 기업이 프리랜서를 고용하고 있다. 대다수 기업이 긱 워커와 원격 근무 기반의 혼합 모델을 미래의 핵심 경쟁력으로 보고 있다. 이 모든 것이 AI가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긱 워커가 많아진다는 것은 대부분 임금을 낮추고, 혜택을 줄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많은 사람의 삶이 더 나빠질 수 있다. 본질적으로 긱 이코노미의 일자리 안정성은 떨어진다.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AI가 어느 순간 긱 워커가 해왔던 특정 업무를 완전히 대체할 수 있다. AI 알고리즘이 근로자가 아닌 고용주(기업)에게 편향적이라면, 효율성이라는 명목으로 더 과중한 업무를 더 낮은 임금으로 제공할 수 있다. 긱 워커끼리 약탈적 경쟁을 촉발하면서 열악한 근로 조건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한다. 긱 워커는 조직적 힘을 갖추기 힘들기에 임금을 협상할 수 있는 권한이 없다. 법적 구제 수단도 제한받는다.

AI가 앞으로 긱 이코노미의 중추적 역할을 하며, 근로자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할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프리랜서를 위한 디지털 플랫폼 기업은 AI를 통해 어느 때보다 더 많은 일자리에 접근할 수 있게 지원한다고 밝힌다. 긱 워커를 돕기 위한 더 많은 AI 기술과 도구도 개발하고 있다. 이를 통해 언제 어디서나 정해진 시간에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게 한다. AI를 활용해 짧은 시간에 작업을 완료할 수 있기에 더 높은 수익을 보장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AI를 통해 낮에는 프리랜서 마케터로, 밤에는 배달 라이더로 근무 일정을 계획해 자신의 시간을 최적화하고 수입을 극대화한다. AI가 긱 워커와 일거리 매칭을 최적화해 효율적인 업무 배분을 지원하기에 가능하다. 

AI 기반 긱 이코노미 시대에서 (개인적으로 바라는) 먼저 해결해야 할 과제는 ‘공정한 임금의 보장’이다. 긱 워커는 비슷한 업무임에도 상황에 따라 보수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이때 AI 기술이 개인의 노력에 대한 대가를 정당하게 받을 수 있는 방식으로 작동하면 좋겠다. AI 알고리즘이 한쪽으로 편향되지 않게 업계 표준, 위치, 경력과 능력 수준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보수에 대한 적절한 통찰을 제공해야 한다. 긱 워커는 이러한 정보를 활용해 자신의 가치를 파악하고 공정한 보수를 받을 수 있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AI에 의해 긱 이코노미는 혁신적으로 변하고 있다. 우리는 AI의 힘을 활용해 어떤 식으로든 자신만의 지속 가능한 커리어를 쌓아야 한다. AI의 잠재력은 무궁무진하기에 이를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방법을 이해하고 습득하는 것은 불안한 미래를 준비하는 데 있어 중요하다.

AI의 영향력은 점점 더 강해지고, 이전에 없던 새로운 가능성과 도전 과제를 창출한다. 기업의 업무도 빠른 속도로 AI를 통합할 것이다. 미래의 삶은 지금보다 더 고단해질 수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나의 경쟁 상대가 다른 인간이 아닌 거대한 AI 시스템일 수 있다. 이 시스템은 주어진 조건에만 충실할 뿐 인간다운 감정이나 공감은 없다.  

인류에게 큰 영향을 미치는 혁신적인 기술은 그 자체로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 그것을 주도하고 설계하는 사람(또는 기업)이 어떤 의도를 갖느냐에 따라 모습이 드러난다. 때론 시작은 선했지만, 악한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긱 이코노미를 위한 디지털 플랫폼이나 소수의 빅테크 기업에게 모든 것을 맡겨서는 안 된다. 그들이 과연 우리의 미래를 책임지고 구원할 수 있을까? 그들에게 긱 워커를 포함해 모든 근로자의 더 나은 삶을 위한 이타주의를 바라서는 안 된다. 19세기 산업혁명 이후, 자본주의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대부분 기술은 근로자보다는 압도적인 권력과 부를 가진 사용자(기업) 편에서 약탈적 방식으로 활용되는 경우가 빈번했다. 이러한 힘의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해 정부의 정책적 개입과 노력이 필요하다.    

올해 초 크리스탈리나 게오르기에바 IMF 총재는 각국의 정책 입안자들에게 AI가 가져올 수 있는 잠재적 위험에 대비할 것을 촉구했다. 포괄적인 사회 안전망을 구축하고 취약한 근로자를 위한 재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할 것을 요청했다. 그녀는 “AI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 이 시대가 모두에게 번영을 가져다줄 수 있게 우리가 모두 힘을 써야 한다”라고 말했다. 

AI로 인해 더 치열해질 긱 이코노미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필자도 지금은 정규직에 종사하지만 머지 않은 미래에 긱 워커가 될 것이다. 과연 모두가 공정한 대가를 안정적이고 지속해서 받을 수 있는 포용적인 긱 이코노미 시대는 올 수 있을까? 미래가 어떤 식으로 결정될지 알 수는 없다. 단지 지금은 개인적 차원이라도 AI 기술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활용하는 방법을 모색하고, 작게나마 점진적으로 실행해 봐야겠다. 그리고 긱 워커 특성상 느슨하겠지만 최소한의 연대의식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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