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경수 IT칼럼니스트]코로나19 팬데믹이 한창이었던 2020년 5월 19일, 마이크로소프트 연례 개발자 행사 ‘빌드 2020’는 온라인으로 개최됐다. 사티아 나델라 CEO는 기조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개발자의 역할이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기입니다.) 2년이 걸릴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이 2개월 만에 이뤄졌습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코로나19가 기업 비즈니스는 물론 사회 전 영역에서 디지털 기술의 확산을 촉진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코로나19 이전까지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DX 또는 DT라고 명명했던)’는 테크 업계의 가장 큰 화두였다. 한편에서는 뜬구름 잡는 그들만의 마케팅 용어로 치부됐다. 현실 세계에서는 막연히 ‘미래 어느 순간에 디지털 전환을 하면 되지 않을까’라고 했다. 당장 시작하기에는 부담스럽고 절박하지도 않았던 것 같다. 누군가 먼저 ‘검증된 성공 사례를 선보이면 그때 따라 해도 늦지 않다’라는 눈치 게임의 양상이라고 할까. 

그랬던 것이 코로나19로 인해 기업 업무나 학교 수업 등 각 영역에서의 모든 일들이 강제적으로 비대면으로 이뤄져야 했다. 막연하게 여겨졌던 디지털 전환이 정말 생존의 문제로 다가온 것이다. 여기에 더해 각국은 코로나19에 따른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재정지출과 통화공급을 확대하는 정책을 펼쳤다.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이 1969년에 발표한 논문 ‘최적화페수량’에서 소개한 “경제위기가 발생하면 헬리콥터에서 돈을 뿌려서라도 경기를 부양해야 한다”는 일명 헬리콥터 머니가 시행된 것이다. 테크 업계는 최대 호황을 누리는 역설적인 상황이 발생했다. 

2021년 말 코로나19 충격은 인플레이션 공포로 바뀌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공식화된 테이퍼링(유동성을 확대하기 위해 시행하던 양적완화 조치를 축소하는 것)과 이어진 금리인상, 2022년 2월 발발한 러-우 전쟁 등 새로운 경제 리스크는 불확실성을 고조시켰다. 세계는 경기침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그 결과 2022년 이후 전 세계 투자 규모는 큰 폭으로 감소했다. 기업가치 하락에 따른 IPO(기업공개) 성과도 암울했다. CB인사이트의 벤처 현황 보고서(CB insight, state of venture 2022)에 따르면 2022년 투자 금액은 전년 대비 35%, IPO 성과는 31% 감소했다.

몇 년간의 롤러코스터와 같은 상황에서 올해 IPO 시장의 가장 주목받은 기업은 영국 반도체 설계업체 ARM이었다. 지난 9월 14일, ARM은 투자자의 높은 관심 속에 공모 희망가 범위의 최상단에 해당하는 51달러로 미국 나스닥에 상장했다. 상장 첫날 ARM은 공모가보다 10% 높은 56.1달러로 시작해 약 25% 급등한 63.59달러에 거래를 마쳤다.

ARM은 저전력·고효율이 중요한 모바일, 임베디드, 사물인터넷(IoT) 등 특정 분야의 반도체 설계에서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기업이다. 스마트폰 AP(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의 99%가 ARM의 설계를 바탕으로 할 정도다. 

 [사진: 셔터스톡]
 [사진: 셔터스톡]

최근 몇 년간 시장의 큰 출렁임은 있었지만 디지털 기술의 확산은 자연스레 클라우드 컴퓨팅 시장의 성장과 이를 뒷받침하는 데이터센터의 (지속적이고 폭발적인) 증가로 이어졌다. 다수의 대규모 데이터센터를 운영하는 클라우드 업계는 자연스럽게 전력을 덜 소모하고, 에너지 효율이 높은 ARM 활용 가능성에 주목한다. 

데이터센터의 가장 큰 고민은 발열, 전력 사용, 탄소배출 등 에너지 효율(또는 절감) 문제이다. 이는 곧 데이터센터 운용 비용과 밀접하게 연결된다. 특히 아직은 자율 영역인 ESG(환경, 사회, 지배구조)가 직접적인 규제 리스크로 다가오고 있다. 거의 모든 기업의 경영과 사업 경쟁력 확보에 대응해야 할 필수 이슈로 작용하고 있다. 

데이터센터의 운영되는 서버 CPU의 역사를 간략하게 살펴보자. 매우 오랜 기간 IBM S/360으로 상징되는 대형 컴퓨터 시스템인 메인프레임이 있었다. 1990년부터 인터넷 기반의 e비즈니스 시대가 본격화된다. 이에 유연하면서도 고성능과 안정성을 보장하는 스팍, 파워PC 등 2000년 중반까지는 유닉스의 전성기였다. 이후 AWS, 마이크로소프트 애저 등 클라우드 서비스가 등장한다. 클라우드 기반의 디지털 전환 시대로 접어들면서 현재는 x86이 대세로 자리 잡았다. 

그렇다면 내일의 ARM이 오늘의 x86이 될 수 있을까. 미국 자산운용사 ARK 인베스트의 보고서(Big Ideas 2021)에 따르면 ARM은 2020년 시장점유율이 0%였지만 2030년까지 시장의 71%를 차지할 것으로 예상한다. 대만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는 세계 서버 CPU 시장에 ARM의 비중이 2022년 3%에서 2025년에는 25%까지 증가할 것으로 전망한다. 두 곳 모두 ARM이 매우 빠른 속도로 x86을 대체할 것으로 예상한다.

데이터센터 아키텍처 시장 전망(출처: ARK Investment Management LLC, 2020
데이터센터 아키텍처 시장 전망(출처: ARK Investment Management LLC, 2020

실제 클라우드 기업의 움직임도 ARM에 긍정적이다. 클라우드 서비스 1위 사업자 AWS는 2018년 자체 개발한 ARM CPU ‘그래비톤’을 공개했다. 현재 3세대 서비스를 제공 중이다. 이를 통해 AWS는 3년간 수십억 달러의 매출을 올렸고, 고객도 컴퓨팅 비용을 최대 40%까지 절감했다고 알려졌다(그래비톤 2의 경우 인텔 제온 CPU보다 달러당 48% 더 높은 성능을 보였다).

마이크로소프트 애저도 조금 늦기는 했지만 지난해부터 ARM 기반 인스턴스 서비스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회사 측은 동급의 x86보다 최대 50% 더 향상된 가격 대비 성능을 달성할 수 있다고 밝혔다. 최근 개최한 글로벌 컨퍼런스 ‘이그나이트 2023’에서는 클라우드 네이티브를 위한 ARM 기반 CPU ‘코발트 100’를 공개했다. 에너지 단위당 더 강력한 컴퓨팅 성능을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2024년 초부터 애저의 주요 서비스가 코발트 100 기반으로 제공될 예정이다. 

국내에서도 SK텔레콤이 ARM 기반 클라우드 어플라이언스 사업에 나섰다. 회사 측이 밝힌 검증 결과를 보면 동일한 트래픽 용량을 처리하는 환경에서 전력소비량은 x86 대비 최대 40% 감축, 동일 전력 대비 성능은 최대 120% 향상되는 효과를 보였다고 한다. 

여러 클라우드 기업의 행보나 벤치마크 결과만을 보면 서버 시장에서 ARM은 큰 성장 가능성을 갖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다만 x86은 80년대 이후 PC 시절부터 최근의 클라우드 컴퓨팅에 이르기까지 오랜 기간 광범위한 생태계를 켜켜이 쌓아왔다. 강력한 범용성을 바탕으로 현실 세계의 수많은 상황에서 성능 최적화를 일궈왔다. 

현존하는 대부분의 클라우드 서버 프로그램은 x86을 기반으로 설계돼 운용되고 있다. ARM 기반 서버가 x86를 대체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소프트웨어 개발자(혹은 개발사)가 시장에 참여해야 한다. 기존의 무수히 많고 복잡한 x86 기반의 업무 프로그램이 ARM에서도 문제없이 잘 운영돼야 한다. ARM을 위한 킬러 소프트웨어도 필요해 보인다.

x86과 ARM의 구조적인 차이도 살펴야 한다. x86은 성능을 최적화하기 위해 복잡한 연산을 실행할 수 있게 설계됐다(Complex Instruction Set Computer, 복잡 명령어 집합 컴퓨터). 반면 ARM은 특정 영역의 저전력·고효율을 위해 단순 연산을 위한 구조이다(Reduced Instruction Set Computer, 축소 명령어 집합 컴퓨터). 갈수록 복잡해지고 있는 클라우드 시장에서 이 차이가 완전히 극복될 수 있을지는 두고 봐야 한다. 이와 관련해 레드햇 웹사이트에 올라온 내용을 일부 공유한다.

“x86 CPU은 컴퓨팅 성능이 매우 빠른 편이라 프로그래밍과 명령 수가 더 명확하거나 단순한 대신, 수많은 트랜지스터가 집적된 더 크고 값비싼 칩이 필요합니다. ARM 프로세서는 어떤 유형의 연산에는 매우 빠르지만, 연산이 복잡해지고 연산 정의 및 실행을 위한 작업이 명령 집합이 아닌 프로그래밍(및 프로그래머)으로 푸시됨에 따라 개별 연산의 주기가 반복되면서 속도가 느려질 수 있습니다"

모바일과 서버의 중간 지대에 있는 PC 시장을 보자. 애플은 ARM 기반 M 시리즈 CPU를 맥에 탑재하면서 x86보다 월등한 성능을 보였다. 시장 점유율도 2배 가까이 끌어올렸다. 한 회사가 하드웨어에서부터 운영체제, 그 위에서 동작하는 프로그램까지 일원화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반면, x86 기반의 윈도PC는(서버 시장도 그러하겠지만) 하드웨어에서 소프트웨어까지 다양한 분야의 수많은 플레이어가 거대하고 확고한 생태계를 이루고 있다. 한때 ARM 기반 윈도PC가 출시됐지만 결과는 미미했다. 기존 프로그램의 호환, ARM 네이티브 및 각종 드라이버 지원 등 뭐 하나 만족스러운 수준이 아니었다. 출시 전 테스트 환경에서는 좋은 성능과 가능성을 보였더라도 현실 세계에서 복잡한 이해관계자의 지원이 빠르게 이뤄지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최근 엔비디아와 AMD가 2025년 윈도PC에 탑재할 수 있는 ARM CPU를 선보인다고 한다. 과연 이번에는 x86을 어느 정도 대체할 수 있을지 지켜보자.

반면 x86 진영에서도 ARM만큼의 에너지 효율을 보장하는 CPU를 제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인텔은 지난 9월 19일 개최된 ‘인텔 이노베이션 2023’에서 E코어를 품은 저전력 친환경 서버용 5세대 제온 칩을 발표했다. 4세대 제온 대비 2.4배 향상된 성능을 지원한다. 2024년 상반기 출시될 예정이다. E코어는 저전력과 높은 에너지 효율로 단순 작업을 처리하는 ARM의 특징을 갖춘 시스템이다. 

미래의 디지털 시대(혹은 클라우드 데이터센터)에는 성능을 보장하면서도 전력 소비와 비용을 줄일 수 있고, 범용성과 호환성까지도 확보한다면 이보다 더 좋을 수 없겠다. x86이 시장장악력을 계속 유지해 갈지 아니면 미래의 ARM이 오늘의 x86의 자리를 차지할지 아무도 알 수 없다. 

세상사에 정답은 없다. 상황에 따른 해답만 있을 뿐이다. 계속해서 변하는 사람의 마음은 이성적판단으로 전부 알 수가 없다. 더불어 코로나19 팬데믹, 러-우 전쟁 같은 사태가 생길 것이라고 누가 과연 예측했겠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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