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옥 디지털투데이 편집국장
한민옥 디지털투데이 편집국장

# 지난해부터 기술특례로 코스닥행을 추진해 온 인공지능(AI) 솔루션 업체 A사는 올 들어 상장심사를 자진 철회했다. 기술특례 상장을 위한 기술력 평가에서 최고 등급인 AA와 A를 받았지만 이후 열린 상장위원회의 문턱을 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보안인증 솔루션 업체 B사 역시 최근 코스닥 특례상장을 포기했다. 이 회사도 기술력 평가에서는 A와 BBB 등급을 받아 요건은 충족했으나, 보유한 기술로 앞으로 얼마나 실적 성장이 가능할 것인지 등을 구체적으로 요구하는 상장위원회의 좁은 문을 통과하지 못했다는 후문이다.

기업공개(IPO) 시장이 유례없는 호황기를 누리고 있지만 상장예비심사 단계에서 고배를 마시는 업체들이 늘고 있다. 앞서 언급한 곳들을 포함해 올 들어 상장 심사를 철회했거나 탈락한 업체가 11개사로 전년(4개사) 전체 수치를 훌쩍 뛰어넘었다. 이중 상당수가 특례상장을 추진한 벤처기업들이다. 특례상장을 신청하는 업체들이 많아졌다고 볼 수도 있지만 한국거래소가 특례상장 ‘고삐 조이기’에 나섰다는 시각이 우세하다.

# '유니콘'으로 불리는 한국의 성공 벤처기업들이 잇따라 해외 주식시장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 쿠팡의 뉴욕 증시 상장을 첫 신호탄으로 마켓컬리, 비바리퍼블리카, 두나무, 카카오엔터테인먼트 등도 미국 주식시장에 상장할 채비를 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환영할 만한 일이다. 미 증시가 어떤 곳인가. 애플, 마이크로소프트, 아마존닷컴, 페이스북, 알파벳, 인텔 등 내로라하는 혁신기업들이 총집합해 있는 명실상부 벤처기업 꿈의 시장이다.

유동성은 또 어떤가. 전세계 수많은 기관·외국인 투자자들이 유망기업을 사고팔며 엄청난 거래량을 보여주고 있다. 실제 쿠팡은 뉴욕 증시 상장으로 100조원대 기업가치를 인정받았다.

우리 주식시장에서 시가총액 100조원 이상의 기업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두 곳뿐이다. 과연 적자 기업인 쿠팡이 국내 증시에 상장했다면 이같은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었을까.

그럼에도 뒷맛은 씁쓸하다. 국부 유출 논란은 차치하더라도 유망 기업들의 잇단 이탈은 열악한 우리 자본시장의 현주소이기 때문이다. 더 안타까운 건 왜 우리 유니콘 기업들이 미국행을 선택하는지 정부나 거래소가 제대로 된 진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 유망기업들이 미국 증시 입성을 선망하는 가장 큰 요인은 한마디로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듯 우리 주식시장은 복수의결권 규제 등으로 제대로 된 기업가치를 인정받기 어려운 구조다. 반면 거래소의 상장심사는 까다로운 편이다. 자본조달 경쟁력은 해외 시장에 비해 떨어지면서 문턱만 높은 셈이다.

그런데 이게 다가 아니다. 사실 정부와 거래소는 국내 기업 이탈 방지는 물론 해외 기업 유치를 목표로 그동안 다양한 시장 활성화 정책을 내놨다. 특히 한국의 나스닥을 표방한 코스닥의 경우 기술특례, 성장성특례, 소부장(소재·부품·장비)특례, 테슬라특례 등 다양한 특례상장제도를 도입해 자금력이 없어도, 사업성과가 미흡해도, 심지어 적자가 나도 입성할 수 있도록 문턱을 낮췄다. 문제는 일관성 없는 운영이다.

불과 4개월여 전인 지난해 말 거래소는 코스닥 특례상장을 위한 기술평가를 강화, 올 1월 1일부터 시행에 들어갔다. 평가항목 수를 기존 26개에서 35개로 대폭 늘렸고 주요 평가사항별로 핵심 내용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도록 했다. 거래소의 이런 분위기는 사실상 지난해 말부터 반영, 올 초 상당수 기업의 상장 포기와 무관치 않다는 게 벤처업계의 전언이다.

그러더니 이제 다시 기술특례를 완화하겠다고 한다. 지난달 말 손병두 한국거래소 이사장은 기자간담회를 열고 유니콘 기업의 상장을 활성화하겠다며 코스피 시가총액 단독요건 신설, 코스닥 상장을 위한 기술특례 평가 절차 간소화 등을 내걸었다. 이러니 상장도 '운'이라는 소리가 흘러나오는 것이다.

# 특례상장에 문제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한때 코스닥 시가총액 2위에 올랐던 기술특례 기업인 신라젠과 헬릭스미스는 각각 경영진의 횡령·배임 혐의와 세전손실 지속으로 시장에 큰 혼란을 야기한바 있다. 그렇다고 문제가 생길 때마다 기준을 바꿀 수는 없다.

미국 주식시장은 상장심사 요건이 우리보다 덜 까다로운 대신, 문제가 생기면 기업이 모든 책임을 진다. 투자자 보호를 위한 기업의 컴플라이언스를 강조하고, 이를 어길 경우 경영진에 대한 형사 처벌, 징벌적 손해배상제, 집단소송제 등 강력한 제재를 가한다.

반면 우리 시장은 어떤가. 상장하기까지가 힘들뿐 일단 입성만하면 전 세계 증시 중 가장 유지가 쉬운 곳 중 하나로 꼽힌다.

기업간 경계가 허물어진 글로벌 무한경쟁의 시대, 어쩌면 국내외 증시를 구분하는 자체가 의미없는 얘기일 수 있다. 그래도 미래 성장기업들이 해외로 나가는 것을 늦추고 싶다면 정부와 거래소는 규제를 더 완화하고 상장문턱을 더 낮춰라. 대신 강력한 사후 감독으로 시장 건전성을 강화하면 어떨까. 국내 증시 환경을 매력적으로 만드는 게 먼저다.  

mohan@d-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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