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니스 = 디지털투데이 민병권 기자] 프랑스의 실리콘밸리라 불리는 소피아 앙티폴리스에 자리한 벤츠 유럽 디자인센터. 이곳을 방문했을 때 한가지 이채로운 경험을 할 수 있었다. 디자이너들이 특별한 것을 보여주겠다면서 데리고 들어간 곳은 침침한 조명만 켜진 어둡고 비어있는 큰 방이었다. 콘크리트가 노출된 좁은 입구로 들어설 때 벽에 적힌 ‘TOP SECRET’ 표지를 읽었기에 벤츠가 개발중인 신차나 미공개 콘셉트카를 보여주는 줄 알았는데 예상이 빗나갔다.

컴컴한 한쪽 벽면 중앙에 큼지막한 TV 모니터가 걸려있고 방의 구석마다 VR 헤드셋 또는 콘솔 게임기의 컨트롤러가 놓여있었다. 우선 TV를 통해 짧은 영상을 시청했다. 거창한 배경음악과 함께 CG 애니메이션으로 구현돼 화면에 등장한 것은 이세상 벤츠가 아니었다. 거대한 수송기가 하늘을 날았고 그 안에 실린 2대의 차가 비춰졌다. 벤츠 마크가 붙어있긴 하지만 지금의 벤츠와는 완전히 다른, 미래형 스포츠카들이었다.

벤츠 타이푼 프로젝트의 비행기 실루엣
벤츠 타이푼 프로젝트의 비행기

게임의 오프닝을 방불케 했던 짧은 영상에 이어, 격납고 안쪽에 비행기와 2대의 차가 서있는 광경이 나타났다. 이제 각 차의 디자인을 요리조리 살펴보고 음미할 차례다. 그걸 위해 마련된 것이 VR 장비와 게임 패드였다. 조이스틱을 이리저리 움직이면 시점이나 초점거리를 바꿀 수 있다. 차체 표면에 가까이 다가가면 껍질이 벗겨지고 속살이 드러나듯 새로운 질감이 묘사되기도 한다. 실제 격납고 안에 들어간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VR은 더욱 실감나는 상호작용을 통해 차들을 살필 수 있도록 한다.

만약 이것이 VR이나 CG 전문가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면 그리 놀랄 것은 없다. 앞서 말한 것처럼 자동차 레이싱 게임에서 익히 보던 영상과 별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놀라운 것은 이러한 결과물을 소수의 벤츠 디자이너들이 여가 활동을 통해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비행기와 차의 3D 디자인은 물론이고 디자인 품평을 위해 VR 장비와 게임 컨트롤러를 프로그램 하는 것까지 직접 해냈다.

벤츠 타이푼 프로젝트
벤츠 타이푼 프로젝트

이 모두를 통칭하는 ‘타이푼 익스피리언스(TYPHOON EXPERIENCE)’는 정말 비밀 프로젝트로 진행됐다. 어찌나 비밀스러웠던지 벤츠 디자인 부서의 관리자들조차 존재를 몰랐을 정도다. 그도 그럴 것이, 회사의 공식 디자인 업무와는 아무 관계 없이 디자이너들이 스스로 원하는 디자인을 구체화하기 위해 시작한 프로젝트였다.

“먼저 제가 길이 65m짜리 비행기를 일주일에 걸쳐 디자인했어요. 그 비행기 이름이 타이푼이었죠.” 프로젝트를 주도한 디자이너가 말했다. 비행기에 이어 차까지 디자인해낸 그와 일당들은 동료들에게 이를 선보였고, 이윽고 이 작업에 참여하길 원하는 이들이 나타나면서 판이 커졌다. 징행과정에서 관리자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한 명칭으로 타이푼을 썼다. “타이푼이라고 부르면 보스들 귀에 들어가더라도 뭔지 알 수 없을 테니까요.”

벤츠 타이푼 프로젝트
벤츠 타이푼 프로젝트

오픈 프로젝트는 2개 팀으로 나누어 진행했고, 보다 나은 디자인을 최종안으로 선택하기 위해 자체 경합도 벌였다. 각기 다른 디자이너가 제안한 8개 모델 중 2개가 최종 결과물로 선정됐다. 프로젝트 관련 작업은 하루 30분에서 한 시간씩, 근무시간 외에 자투리 시간에 진행했다. “근무시간에 하다가 상사에게 걸리면 안되니까요. 근무시간에는 공식 프로젝트에 매달려 있느라 여념이 없기도 하구요.” 업무시간 내내 디자인을 하다 보면 지겨워질 법도 한데, 여가시간마저 같은 일을 하는데 할애 했다니 언뜻 이해가 되질 않았다.

“업무시간에 하는 공식 프로젝트는 지켜야할 것들이 많아요. 상부의 지시에도 따라야 하구요. 그런 것들에 구애 받지 않고 자유롭게 디자인을 하고픈 욕구가 있었어요. 창의성은 물론 CAD나 VR관련 실력도 십분 발휘할 기회가 되었구요.” 프로젝트의 비밀 유지는 그래서 더욱 중요했다.

벤츠 타이푼 프로젝트
벤츠 타이푼 프로젝트

“정해진 룰에 따라 디자인하면 화면에 보는 이런 벤츠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벤츠의 별을 이런 식으로 부착하거나 모서리를 이렇게 처리하는 것은 벤츠의 현재 디자인 언어인 센슈얼 퓨리티(Sensual Purity)에 어긋나고 너무 도발적이라는 평을 듣기 십상 이에요. 정식 프로젝트였다면 승인이 나지 않거나 아예 초기단계에서 배제 됐을 디자인입니다. 타이푼은 그런 규칙들에 얽매이지 않고 새로운 아이디어들을 구체화하려는 시도였지요. 기능에 충실한 형태를 가진 비행기에서 영감을 얻어 새로운 비례와 형태를 찾아냈어요.”

벤츠 타이푼 익스피리언스
벤츠 타이푼 익스피리언스

덕분에 타이푼 프로젝트는 관리자들의 간섭이나 원래의 디자인 의도를 희석시키는 외부 요인들 없이 디자이너들의 머릿속에서 나온 그대로를 보여줄 수 있도록 완성됐다. 그리고 그런 결과물이 나온 후에야 VR 품평을 통해 상사들에게 전모가 공개됐다. 뒤통수를 맞았다고 생각할 법도 하건만, 상부의 반응은 놀랄 만치 긍정적이었다. 벤츠의 모든 디자인 부서에서 이에 대한 시연이 이루어졌고 향후 공식적인 디자인 업무에도 이를 적극 접목하기로 했다. 디자이너들끼리의 감춰진 습작으로 그쳤을 수도 있는 프로젝트가 이렇게 조금이나마 알려지게 된 이유다.

벤츠 타이푼 익스피리언스
벤츠 타이푼 익스피리언스

이제 VR 기술은 벤츠의 외관 디자인 개발이나 디자이너들이 얻은 영감을 표현하는 과정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VR 기술 덕분에 디자인 개발 과정의 초기 단계부터 형태와 비율, 공기 흐름을 시뮬레이션 할 수 있다. 이로 인해 디자인 개발 과정이 가속화되고 훨씬 더 편리해진다. VR 기술은 새로운 방식의 형태 및 공간 디자인을 시도할 수 있으며, 무엇을 선택할지를 결정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그나저나, 임원들의 호응을 얻어낸 타이푼 프로젝트의 다음 단계는 무엇일까? 실물 제작? ‘비전 그란투리스모’ 같은 시판 게임 속의 자동차로 재현? 자신들이 빚어낸 결과물의 파급 효과를 자랑스러워하며 신나서 설명하던 벤츠 디자이너가 이 대목에서는 말을 아꼈다. 현재 또 다른 여가 활동을 하고 있는게 아닐까? 

벤츠 타이푼 프로젝트
벤츠 타이푼 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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