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투데이 신민경 기자] 업계 불황이 장기화하면서 삼성물산 패션부문과 LF 등 '패션공룡'들이 앞다퉈 세컨드 브랜드를 내놓고 있다. 창조보다 응용에 무게를 두는 등 제품 출시 양상이 바뀌는 분위기다. 이를 두고 평가가 엇갈린다. 한편에선 "승부수"라고 치켜세우지만 다른 한편에선 "꼼수"라고 평가절하한다. 자칫 자금력과 유통망 포섭력 등을 앞세운 대기업이 시장을 독식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까지 나온다.

세컨드 브랜드는 '잘 나가는 언니를 둔 동생' 격으로 통한다. 모브랜드의 이름을 딴 브랜드를 출시하면 기존 인지도 덕분에 주요 소비자층을 그대로 흡수하는 장점이 있다. 시장 진입 비용과 마케팅 비용도 덜 들어 신생 브랜드를 띄우는 것보다 경제적이다.

삼성물산 패션의 밀레니얼 여성복 브랜드 구호플러스가 지난 9월 서울 신사동 도산공원에 첫 팝업스토어를 열었다. (사진=삼성물산 패션 제공)

10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삼성물산 패션부문은 지난 9월 밀레니얼 여성복 브랜드 '구호플러스(kuho plus)'를 내놨다. 구호플러스는 출시 후 2주 만에 목표 수량의 3배가 팔려나갔다. 시그니처 코쿤 맥 코트 등 주요 겨울 아우터(겉옷)의 경우 초도 물량이 소진돼 속속 재주문에 들어왔단 후문이다.

구호플러스가 출시와 동시에 인기몰이를 한 것은 모브랜드인 '구호(KUHO)'의 덕이 크다. 지난 1997년 디자이너 정구호의 손에서 탄생한 구호는 지금까지도 40살 안팎의 여성들 사이에서 아이돌급 인기를 누리고 있다. 삼성물산 패션은 이런 구호를 지난 2003년 인수해 자사 대표 고가 여성복 브랜드로 키웠다.

구호와 달리 구호플러스는 온라인 구매가 강세인 2535세대를 겨냥했다. 전 잡화와 의류가 삼성물산 통합 온라인몰인 SSF숍에서만 판매한다. 제품 값은 구호에 비해 50~60% 가량 싸다. 구호의 세련미를 이어받으면서도 가격 부담은 한층 덜었단 점이 실속을 중시하는 젊은 층의 마음을 움직인 것으로 읽힌다.

서울 신사동에 위치한 LF 본사. (사진=신민경 기자)

LF가 위화감 없이 첫 자체 여성 화장품 브랜드로 '아떼'를 내놓을 수 있었던 것도 '언니 브랜드'의 파워 덕분이다. 기존에 전개되던 프랑스 여성복 브랜드인 '바네사브루노 아떼'에서 이름을 땄다. 바네사브루노 아떼는 LF가 국내 판권을 갖고 있는 수입 의류 브랜드 '바네사브루노'의 하위 브랜드로 지난 2012년 출시됐다.

바네사브루노가 LF의 명품이라면 바네사브루노 아떼는 3040세대를 겨냥해 값을 조정한 준명품으로 통한다. 여기서 소비자층을 더 좁힌 것이 지난 10월 출시된 아떼다. 아떼는 프랑스 비건(채식주의자) 인증기관 이브(EVE)사로부터 검증 받은 '비건 지향' 화장품 브랜드다.

아떼는 공식 온라인몰인 LF몰에서 첫 선을 보인 뒤 지난달 초 현대백화점 판교점에 단독 매장을 열었다. 선뵌 스킨케어류와 메이크업류 30여종 가운데 립스틱제품인 '어센틱 밤'은 출시 2주 만에 LF몰에서 품절되기도 했다. LF 관계자는 "니치 마켓인 비건 시장에 꾸준한 수요가 잡히고 있다"면서 "바네사브루노 아떼의 고급스러움을 잇고자 향후 편집숍보단 백화점 등을 통해 유통망을 확대할 것"이라고 밝혔다.

LF의 비건 여성화장품 브랜드인 아떼가 지난달 4일 현대백화점 판교점에 1호점 매장을 열었다. (사진=LF 제공)

이처럼 대기업들은 성공 여부를 점치기 어려운 신규 브랜드보다 이미 시장의 검증을 거친 인기 브랜드에 관심을 갖는 모습이다. 이 대목에서 '반쪽짜리 론칭'이란 비판을 피해가긴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신규 브랜드를 내놓을 여력이 있는 대기업이 시장의 부름에 적극적으로 호응하려 들지 않는다는 시각에서다. 김윤희 한남대 의류학과 교수는 "불안한 업황에 인수합병(M&A)이나 해외 브랜드를 직수입 등의 경로를 통하려는 것도 고무적인 행보"라면서도 "대기업이 우리 고유 브랜드의 성장을 위해 위험 부담을 안기보다 안전한 길만 찾으려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학계 일각에서는 잇단 세컨드 브랜드 론칭이 중소기업과 대기업에게 되레 후폭풍을 입힐 수도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서추연 동아대 패션디자인학과 교수는 "의류업계 특성 상 규모가 작은 기업들이 대부분인데 대기업과 비교해 광고비와 생산단가 측면에서 경쟁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했다. 소비자 인지나 유통망 진입 등에 있어서 중소업체들이 겪는 차별요소들이 많을 것이란 얘기다.

서 교수는 또 "불매운동 등 소비자 권리가 강해지는 가운데 기존 명품 브랜드가 사건에 휘말릴 경우 하위 브랜드들 또한 자연스레 타격 사정권 안에 들 것"이라면서 "대기업들로선 세컨드 브랜드 출시를 남발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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