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투데이 신민경 기자] 패션과 영화의 밀회를 훔쳐본다면 이런 느낌일까. 한국콘텐츠진흥원과 한국패션디자이너연합회가 주관한 아시아 최대 규모의 패션마켓 '2020 S/S(봄/여름) 패션코드 앤 패스티벌'이 지난 24일 서울 성수동 에스팩토리에서 막을 올렸다. 이번 패션코드에선 한국영화사 100주년을 맞아 패션과 영화를 한 데 합친 '콘셉트 패션쇼'가 열렸다. 우리나라 영화 10편을 패션전문가의 시선에서 재해석한 뒤 관객에게 소개하는 식이다.

(사진=신민경 기자)
디자이너 브랜드 '컨벡소 컨케이브'가 영화 '완벽한 타인'의 패션을 소개했다. 해당 브랜드 옷을 입은 모델이 워킹 중이다. (사진=신민경 기자)

24일 오후 5시엔 영화 기생충과 올드보이 등 7편 속의 패션이 30분간 소개됐다. 난생 '패션쇼'란 것을 본 적이 없는 기자는 프레스석에 어정쩡한 자세로 앉아 무대 위 모델들을 쳐다봤다. 시선을 맞은편으로 돌리니 관객석이 보였는데 멋들어지게 차려 입고 온 사람들이 많았다. 재킷 하나 걸치고 온 기자는 누가봐도 '이방인'스러웠다. 하지만 한편으론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여 이질적인 패션문화를 함께 감상한단 생각에 괜히 설렜다.

패션쇼를 구성한 이는 모델 뿐이 아니었다. 드럼·기타 연주자 3명과 가수 1명이 영화의 중심 음악을 만들어줬다. 듣는 즐거움이 함께 하니 각각의 옷들에 영화적 요소를 녹여보는 데 힘이 덜 들었다.

먼저 디자이너 브랜드 '프릭스'가 주도한 영화 '올드보이'의 패션이 소개됐다. 화려한 문양과는 달리 전체적으로 어두운 색으로 통일된 옷들에서 주인공 오대수를 봤다. 옷 효과 때문인지 모델들은 오랫동안 자신을 묶어두고 있는 굴레에 못 이겨 초점을 잃은 사람처럼 보였다. 죄인에 서린 한과 복수 등의 느낌이 잘 표현됐다.

두번째론 브랜드 '이륙'이 영화 '달콤한 인생'의 디자이너로 나섰다. 감싸주고 싶은 마음을 자극하는 복장이 주인공 선우를 연상케 했다. 차례로 나오는 모델들의 옷이 바뀌는 모습은 극중에서 선우가 겪는 감정의 변화를 나타내는 듯했다. '온전한 상태'의 선우는 단정한 차림으로 표현됐지만 '혼란스런 감정에 휩싸인 선우'는 갈라지고 닳아서 갈라지거나 잘린 옷감들을 입은 채 나타났다.

배우 김옥빈의 열연이 인상 깊었던 영화 '악녀'는 브랜드 '스튜디오 디 뻬를라'가 맡았다. 서로 다른 직물로 만들어진 검은색 의상들은 복수심과 자기애를 원색대로 내보였다. 외강내유 인물들을 맘껏 구경하다보니 어느새 기자도 극중 주연인 '숙희'가 된 것만 같았다.

다음으론 브랜드 '컨벡소 컨케이브'가 영화 '완벽한 타인'을 소개했다. 풍자와 조롱이 은밀히 공유됐던 영화의 분위기가 옷에 그대로 뱄다. 도트 프린트(동글동글한 물방울 모양의 무늬)가 돼 있는 헐거운 옷을 입고나온 모델이 눈에 띄었다. 겉으론 티 없이 순진해보이지만 요염한 표정 뒤에 커다란 비밀이 숨어 있는 듯했다. 최근 화두로 떠오른 업사이클링(재활용할 수 있는 소재로 옷을 만드는 일)을 거친 것도 맘에 들었다.

이어선 브랜드 '데일리 미러'가 이끈 영화 '돈'의 패션이 선보여졌다. 도시 여성의 세련되고 중성적인 매력이 느껴졌다. 의상들은 강렬한 빨간색과 검은색 위주로 구성됐다. 순간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속 앤디가 된 것 같아 황홀한 기분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브랜드 '잔키'에 의해 영화 '기생충'의 패션이 소개됐다. 영화 기생충은 흥행에 성공해 '재미'를 보장 받은 동시에 이를 예술로 승화해 '의미'도 인정 받았다. 옷에서도 상업성과 예술성이 교묘하게 어울린단 점이 돋보였다. 모델들이 소품으로 돌과 복숭아를 들고 나온 점도 재밋거리였다.

마크 트웨인은 어느 편지에 이런 글을 썼다고 한다. "짧은 글을 쓸 시간이 없어서 이렇게 긴 글을 올립니다." 전하고 싶은 말을 장황하게 늘어뜨리는 건 쉽지만 요점만 골라 간추리긴 어렵다. 2시간짜리 영화의 방대한 메시지를 단 3분간의 패션쇼에 실하게 담아낸 게 놀라운 것도 이때문이다. 패션과 영화가 섞인다면 어떤 모습일지 궁금한 이들은 이번 패션코드 행사에 가보길 권한다. 오는 26일까지 열린다.

저작권자 © 디지털투데이 (DigitalToday)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