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즉석밥 전성시대③] 도시인의 씁쓸한 자화상
[즉석밥 전성시대③] 도시인의 씁쓸한 자화상
  • 박기태 기자
  • 승인 2019.09.09 14: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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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엔 우유 한잔 점심엔 패스트푸드 쫓기는 사람처럼 시곗바늘 보면서 거리를 가득 메운 자동차 경적소리 어깨를 늘어뜨린 학생들 THIS IS THE CITY LIFE(디스 이즈 더 시티 라이프)."

지난 1992년 그룹 넥스트가 발표한 1집 앨범 'HOME'에 수록된 '도시인(작사·작곡 신해철)'의 시작 부분이다. 이 곡이 나온지 벌써 27년이 지났다.

그 사이 우리 경제는 엄청난 성장을 이룩했다. 1인당 국민소득이 7527달러(약 899만원)에서 3만달러(약 3581만원)로 4배 가까이 뛰었고, 세계 10위권 수출 강국으로 발돋움했다. 

하지만 우리의 삶은 별반 달라진 게 없다. 예나 지금이나 '쫓기는 사람처럼 시곗바늘 보면서' 하루를 보낸다. 직장인들은 여전히 출근 준비로 아침 식사조차 제대로 챙기지 못한다.

냉이 김밥. (사진=신민경 기자)
냉이 김밥. (사진=신민경 기자)

실제로 지난해 10월 취업포털 커리어가 직장인 412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54.4%가 "아침 식사를 하지 않고 출근한다"고 했다. 아침 식사를 거르는 이유론 "시간이 없어서", "잠을 더 자고 싶어서" 등을 들었다.

우리 경제는 급속하게 성장했지만, '바쁜 생활'은 달라지지 않았다는 얘기다. 오히려 평생직장이란 개념이 사라지면서 저성과자로 낙인 찍히지 않기 위해 더욱 바쁘게 움직인다. 밥을 해 먹는 시간까지 아껴 자기 개발에 투자하는 상황이다. 

즉석밥 시장의 가파른 성장세가 이를 잘 대변한다. 최근 농촌진흥청이 발표한 추석 전 농식품 구매패턴 조사 결과에 따르면, 2012년 가구당 평균 구입액이 870원에 불과했던 즉석밥은 지난해 1213원으로 약 40% 늘었다. 즉석밥 등 가정간편식(HMR) 시장은 지난 2015년 1조7299억원에서 2017년 2조5131억원 규모로 커졌다.

허경옥 성신여대 생활문화소비자학과 교수는 "성과주의 시대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시간을 업무와 취미에 쏟는 경향이 강하므로 즉석밥을 계속해서 찾게 될 것"이라고 했다.  

여성의 사회 진출이 당연시 되는 요즘엔 집에서 밥 한끼 할 시간이 더욱 없다. 예전처럼 어머니께서 직접 식재료를 사서 조리한 '집밥'을 내어놓는 모습을 기대하긴 어렵다. 요리하는 섹시한 남자를 뜻하는 '요섹남'이 유행하고 있다지만, 현실 가정에서 요리를 자주 하는 남자도 드물다.

남녀를 떠나 하루 8시간을 회사에서 성과에 매달려 아등바등하다 집에 돌아 온 후 밥을 짓기란 말처럼 쉽지가 않다. 그 대용으로 즉석밥을 찾는 건 어쩌면 당연하다. 세계 10대 강국이 된 지금에도 직장인들은 27년 전의 도시인처럼 밥을 먹는 게 아니라 때우고 있는 것이다.

즉석밥 시장의 성장 추세가 바람직하다거나 그렇치 않다고 평가하자는 게 아니다. 단지 즉석밥의 성장이 격무에 시달리는 직장인들의 '씁쓸한 자화상'을 보는 것 같아 안타까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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