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투데이 양대규 기자] 일본 정부가 한국 대법원의 일제 강제징용 손해배상 판결에 대한 보복 조치로 1일 발표한 반도체·디스플레이 제품에 대한 수출 규제를 4일부터 본격 단행했다. 일본 정부가 제재한 소재는 플루오린 폴리이미드, 리지스트, 에칭가스(고순도불화수소) 등 3개 품목이다.

5일 업계에 따르면, 해당 품목에 대한 규제로 가장 큰 영향을 받을 기업으로 반도체 생산에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디스플레이 생산에는 삼성디스플레이와 LG디스플레이가 거론된다. 이들 기업은 각 시장에서 약 70~80%의 시장 점유율을 지닌 기업으로, 일본의 제재에 일부 타격이 불가피하다.

전문가들은 일본의 반도체 소재 수출 규제로 인한 국내 기업의 피해가 일부 불가피하지만, 실질적으로 이로 인한 피해 규모가 크지는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일부는 일본 정부의 이번 규제가 국내 기업보다는 일본 소재 기업에 더 큰 피해를 줄 것으로 전망한다.

익명을 요구한 관련업계 전문가(연구원)는 “단기적으로 공급과잉이었던 제품을 해소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며, “장기적으로도 아베 정부의 이번 조치가 21일 열리는 참의원 선거 투표 이후에는 유야무야 넘어갈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일본 정부가 규제한 소재는 플루오린 폴리이미드, 리지스트, 에칭가스 등 3개 품목이다. 플루오린 폴리이미드는 OLED 디스플레이에 사용되며, 리지스트는 반도체 기판 제작의 감광제로, 에칭가스는 반도체 세정에 사용된다. 한국은 플루오드 폴리이미드의 93.7%, 리지스트의 93.7%를 일본에 의존하며, 에칭가스의 수입은 중국 46.3%, 일본 43.9% 규모다.

무디스는 3일 "한국 기업들은 수출규제 대상 소재의 주 소비자일 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메모리칩과 디스플레이 패널의 핵심 공급자"라며, "이들이 생산에 지장을 받으면 글로벌 공급 체인과 일본 업체를 포함한 기술·전자 기업에 심각한 영향을 줄 수 있다"고 경고했다.

삼성전자·SK하이닉스, "납품에 차질 없도록 하겠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이에 대해 본격적인 대응을 펼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사업의 주요 고객사에 "납품에 차질이 없도록 하겠다"는 내용의 서한을 발송했으며, SK하이닉스도 일부 고객사의 문의에 비슷한 내용의 서한을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두 업체는 차질 없이 제품을 공급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며, 문제 발생 시 즉시 알리겠다는 내용의 서한을 전달한 것으로 전해졌다.

또한 4일 김기남 삼성전자 DS 부문장 부회장은 강남 코엑스에서 열린 '2019 대한민국 과학기술 연차대회' 이후, 이번 사태와 관련해 "정부와 긴밀하게 (정보를) 공유하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전문가들은 4일 일본의 수출 규제가 단행됐지만 이로 인한 국내 반도체·디스플레이 업체의 생산 차질은 발생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생산라인은 정상적으로 운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메모리 반도체(사진=SK하이닉스)
메모리 반도체(사진=SK하이닉스)

익명을 요구한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오히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는 공급 과잉 문제로 인한 재고를 처리할 기회”라며, “이 기회에 차세대 공정으로 전환을 꾀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지난해 말부터 반도체 시장에서는 메모리 반도체 공급 과잉으로 재고 물량이 계속 늘어났다. 이에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결국 감산을 단행하기까지 했다. 올 초 업계는 2분기 시장 회복을 기대했으나, 미국과 중국의 무역전쟁이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올해 하반기에도 시장의 회복이 불확실한 상황이었다.

반도체 업계에 따르면, 메모리 반도체의 가격이 지속적으로 하락하면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손실도 더욱 커지고 있다. 양사는 전 세계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서 1, 2위를 차지하며, 메모리 반도체의 매출 기여도가 높은 편이다. 지난 1분기 양사의 영업이익을 확인하면, 전년 동기보다 삼성전자는 60%, SK하이닉스는 69% 각각 감소했다.

2분기는 물론 하반기에도 D램과 낸드 플래시의 가격 하락 기조가 유지되고 있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실적이 좋지는 않을 전망이었다. 4분기는 돼야 메모리 반도체 시장이 회복이 예상됐는데, 전문가들은 이번 일본 정부의 규제로 양사는 기존의 재고를 처리하며 장기적인 생산 플랜을 다시 돌아볼 계기가 될 수도 있다고 보고 있다.

일본산 PI 규제로 폴더블폰 생산 차질 우려

디스플레이 업계도 비슷한 맥락에서 볼 수 있다. 다만 일본 스미토모의 폴리이미드 제품을 대체할 만한 높은 품질의 소재를 생산하는 업체가 없기 때문에 일부 스마트폰 생산에는 차질을 겪을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업계에 따르면, 삼성디스플레이는 스마트폰용 디스플레이 패널 대량 생산을 위해 일본의 스미토모 소재를 사용하고 있으며, 삼성에 비해 스마트폰 생산량이 적은 LG전자에 패널을 공급하는 LG디스플레이는 코오롱 인더스트리의 제품으로 대체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문제는 폴더블폰에 사용되는 폴더블 디스플레이다. 중국의 OLED 공세에 대응하기 위해 주목받고 있는 차세대 먹거리인 폴더블 디스플레이의 커버 윈도우는 접히는 특성상 유리 소재보다는 ‘투명 PI’를 사용할 수밖에 없다.

삼성전자의 폴더블폰 '갤럭시 폴드'(사진=삼성전자)
삼성전자의 폴더블폰 '갤럭시 폴드'(사진=삼성전자)

삼성디스플레이는 일본 스미토모의 투명 PI를 ‘갤럭시 폴드’용 디스플레이 패널의 커버 윈도우로 채용했다. LG디스플레이 역시 높은 수준의 곡률을 위해서는 스미토모의 제품을 이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업계에 따르면, 양사는 소재의 다각화를 위해 노력을 하고 있지만, 단기적으로 대책을 마련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고 있다. 삼성전자의 경우, 차세대 폴더블 스마트폰에 들어갈 박막강화유리(UTG)를 곡률 1.5R 수준으로 구현하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하지만 관련 기술의 개발과 양산화가 아직은 요원한 상황이다.

한편 타다시 우노 IHS마킷 디스플레이 책임연구원은 "현재 미국에서 사전 주문 상태에 있는 삼성 갤럭시폴드의 디스플레이는 일본 스미토모 화학의 제품을 사용했다"며 "코오롱 인더스트리가 대체 공급자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의 제재에도 국내 소재로 대체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정부 매년 1조원 투자, 국내 소재 업계에는 '새로운 기회'

전문가들은 이번 일본의 수출 규제가 오히려 국내 소재 산업을 활성화시킬 수 있는 계기로 볼 수도 있다고 본다. 정부가 이번 기회를 계기로 소재와 관련해 매년 1조 원을 투입하기로 결정하면서, R&D 투자가 확대될 가능성이 크다.

3일 성윤모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2019년 하반기 경제정책방향’ 정부 합동 브리핑에서 "이번에 (일본 정부의) 규제가 되고 있는 소재와 관련해 매년 1조 원을 집중 투자할 것"이라며, "기간산업에 필수적인 소재부품, 수입산 다변화, 국내생산 경쟁력 제고 등 다방면에 걸쳐 정부가 지원에 나서겠다"고 말했다.

또한 정부는 7월 중 ‘소재·부품·장비 경쟁력 강화 대책’을 발표하겠다고 밝혔다. 성 장관은 "부품 소재 관련 경쟁력 제고에 더 적극적으로 나서겠다"며, "관련 대책을 7월 발표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미지=양대규 기자)
(이미지=양대규 기자)

아베 정부는 이번 반도체 소재 수출 규제에 이어 8월 중 ‘백색 국가’에서 한국을 제외하고, 수출 규제 강화 대상 품목을 확대할 계획으로 알려졌다. 첨단소재 수출 허가 신청과 관련해 이를 면제해주는 우대 국가 목록에 한국을 제외하겠다는 것이다. 일본은 미국을 포함한 27개 우방국을 백색 국가로 선정했다. 한국은 2004년 이에 포함됐다. 일본 산케이신문은 “백색 국가에서 한국을 제외하는 것이 발표됐는데, (백색 국가에서) 한국이 최초로 제외된 경우” 라고 보도했다.

이에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장관은 4일 일본의 반도체 제재를 명백한 경제보복으로 규정하며 정부 차원에서의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홍 부총리는 “보복조치는 국제법을 위반한 사항이라 반드시 철회돼야 한다”며, “일본이 규제조치를 철회하지 않으면 세계무역기구 제소 등 조치를 마련하겠다”고 말했다.

또한 화성과 수원등 반도체 주요 생산지를 포함한 경기도도 일본의 수출 규제 조치에 대책 마련에 나섰다. 이재명 경기도지사는 피해기업 지원을 위한 신고센터 설치와 일본 제품의 독과점 현황 전수조사 실시 등을 지시했다. 이 지사는 “이번 수출 규제 조치는 일본 중심의 독과점 상황을 바로 잡을 수 있는 기회”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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