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투데이 신민경 기자] 기술의 진보가 노동 환경 수준을 초월할 경우, 이 괴리를 메우기란 여간 어렵지 않다. '기술 혁신과 이해관계에 얽힌 이'와 '노동자'는 서 있는 곳도 지향하는 가치도 모두 달라서다. 신세계그룹이 이같은 괴리에 빠진 것으로 보인다. 끊임 없는 혁신을 통해 '소비자'에게 최초의, 최상의, 최대의 편리를 제공하려 애쓰는 신세계가 소비자의 또 다른 이름인 '노동자'에겐 비혁신적인 자세를 취하는 듯 해서다.

그룹 내에서 이마트와 편의점, 복합쇼핑몰 사업을 직접 주재하는 정용진 부회장은 수년째 인공지능(AI)과 빅데이터 등 4차산업혁명 기술을 이들 사업에 적용 중이다. 지난 2015년엔 모바일 간편결제 서비스 SSG페이(쓱페이)를 내놨고 2017년 3월엔 업계 최초로 소비자 맞춤형 쇼핑정보를 제공하는 플랫폼 'S마인드'를 개발했다. 같은 해 6월 이마트24 무인편의점의 시범 운영을 시작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셀프계산대·스마트카트'로 혁신유통 나선다던 스타필드 하남 

특히 지난 2016년 9월 경기 하남시에 문을 연 스타필드 하남지점은 신세계가 야심차게 내놓은 '체류형 복합쇼핑몰'로, "소비자의 소비보단 시간을 빼앗겠다"는 정 부회장의 경영전략이 고스란히 반영됐다. 갖은 혁신 기술과 서비스 등이 스타필드 하남지점에 '처음으로' 시도됐다. 이마트가 미국 식료품 유통기업 굿푸드홀딩스를 인수해 도입한 'PK마켓(피코크키친마켓)'이란 자체상표와 지난해 3월 시범 설치된 '고속자동스캔 셀프계산대(자동 무인 계산대)'가 그 예다.

스타필드 내 이마트 트레이더스 계산대에 줄을 선 소비자들의 모습. (사진=신민경 기자)
스타필드 내 이마트 트레이더스 계산대에 줄을 선 소비자들의 모습. (사진=신민경 기자)

신세계 미래생활상 연구 전문가집단인 'S-랩'에서 1년간 만든 AI 기반 자율주행 스마트카트 '일라이'도 하남지점 내 이마트 트레이더스에서 처음 선보여졌다. 일라이는 전 세계에서 첫 시도된 스마트카트로, 사람·음성 인식 감지기를 매달아 소비자를 따라가거나 직접 소비자를 상품이 있는 자리로 안내할 수 있다. 상품 무게 감지기를 통해 계산대에 줄을 설 필요 없이 즉시 결제도 가능하다. 스마트쇼핑을 지향한 정 부회장의 혁신실험 가운데 하나로서 일라이는 지난해 4월 나흘간 시연됐다. 일라이 공개 당시 박창현 이마트 S-랩 팁장은 "음석인식 기능 등 보완할 점이 많으나 일라이가 빠른 시일 내 상용화되도록 연구를 거듭할 것"이라고 밝혔다.

개장 1년반 뒤 가보니...요원해진 '유통혁신'   

개장 1년반여 만인 최근 스타필드 하남지점을 찾았다. 몇곳이나 되는 스타필드 가운데 하남지점을 찾은 건, 널리 알려진 신세계의 선도적인 '유통 혁신'을 체감하기 위해서였다. '최초'에 익숙한 하남지점이 어떻게 유통 4차산업혁명에 대비하며 소비자 맞춤형 서비스를 제고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스타필드 내 이마트 트레이더스에 가보니 지난해 이맘때 화제를 모았던 셀프 계산대와 스마트카트 일라이는 온데간데 없었다. 국내 대형마트에 자동스캔 개념의 무인계산대가 도입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기에 직접 보고 싶었는데, 실망이 컸다. 한 매장 직원에 "셀프계산대 어디 있냐"고 물었더니 "그런 건 애초에 여기 없었다"는 황당한 대답이 돌아오기도 했다. 물론 이들 서비스는 한시적으로 시범 운영된 것이다. 하지만 1년이 지난 현재까지 매장 내에서조차 아무런 언급이 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소비자의 '계산 편의' 증진엔 진전을 보이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약 오후 5시부터 7시까지 2시간 가량 관찰한 각 계산대엔 인파가 넘쳤다. 스타필드도 '주말 저녁 시간대의 지옥 같은 계산대 줄 서기'는 피해가지 못한 듯하다.

트레이더스 내 운반 중인 짐이 무너져 다시 올리고 있는 직원. (사진=신민경 기자)
트레이더스 내 운반 중인 짐이 무너져 다시 올리고 있는 직원. (사진=신민경 기자)

키보다 높은 짐 '수동식 대차'에 싣고 운반하다 '와르르'

온 김에 장을 보려고 둘러보는데, 트레이더스 내부에서 대차를 끄는 직원들이 눈길을 끌었다. 꽤나 위태로워 보여서다. 자신의 키보다 높게 상자들을 쌓아 이동하고 있었는데, 그들이 사용하는 도구는 수동식 대차였다. 한 직원은 "크고 무거운 것들은 (전동)작기로써 옮기고, 작거나 가벼운 것들은 수동식 대차로 옮긴다. 주로 양껏 키보다 높여 올려 이동시키는 경우가 많다"고 답했다. 기자가 한참 걱정스레 이같은 광경을 보고 있을 때쯤, 아니나 다를까 한 직원이 이끌던 짐들이 대차에서 우르르 떨어졌다. 직원은 익숙하다는 듯이 상자들을 옮겨 담았지만, 길을 지나다니는 소비자에게나 직원에게나 불편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올해 1월 31일 시행된 산업안전보건기준에 관한 규칙 제173조(화물적재 시의 조치)엔 '운전자의 시야를 가리지 않도록 화물을 적재할 것'이라고 명시돼 있다. 하지만 이같은 법령을 무시하는 경우가 트레이더스에선 종종 일어나는 듯하다.

이를 두고 정민정 마트산업노조 사무처장은 "스타필드 내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은 구조적으로 첨단이 되지 못할 뿐더러 수많은 소비자들로 인해 오히려 보다 열악한 상황"이라면서 "트레이더스가 창고형 매장인 만큼 보다 큰 박스가 다수 오가는데, 시야를 가릴만큼 쌓으면 안전에 위해하다"고 꼬집었다.

자신의 키보다 높은 짐을 옮기고 있는 이마트 노브랜드 직원. (사진=신민경 기자)
자신의 키보다 높은 짐을 옮기고 있는 이마트 노브랜드 직원. (사진=신민경 기자)

의자 뒀으니 좌식·입식 선택하라고?..."실상은 거의 못 앉아요"

근무환경이 비인간적인 경우는 이뿐만이 아니다. 계산대에서 쉴 새 없이 소비자들의 구매품목을 스캔하는 노동자들의 풍경은 실로 충격적이었다. 각 계산원들 옆엔 의자가 있었으나, 모두 서서 계산히고 있었다. 모종의 책임자로 보이는 남자 직원에게 "왜 직원들이 앉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는 "앉아도 되는데 물건을 옮기고 계산할 땐 서서 하는 게 더 용이하다"면서 "앉아도 되고 서도 되는데 각자 편한 방법을 골라서 할 뿐"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20개에 육박하는 각 계산대들의 주변부를 전부 살펴봤지만 계산원들이 의자를 빼낸 흔적이 전무했다. 편한 방법을 고른다기엔, 의자들이 약속이나 한 듯 가지런하고 정갈하게 '쏙' 들어가 있었던 것. 바빠 보이는 계산원들 가운데 한 명에 가까이 다가가 "왜 앉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 점원은 "사람이 많아서 유동성 있게 움직이려면 서서 하는 게 낫다"면서 "(앉고 싶어도 사람이 너무 많아서) 여태껏 우리 매장에서 앉아서 계산한 적은 거의 없었다"고 답했다. 매장 측에서 언급하는 '의자에 앉을 권리'란 게 노동자들에겐 '유명무실'에 그칠 뿐이었다.

'산업안전보건기준에 관한 규칙' 제80조(의자의 비치)를 보면, '사업주는 지속적으로 서서 일하는 근로자가 작업 중 때때로 앉을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해당 근로자가 이용할 수 있도록 의자를 갖춰 둬야 한다'고 언급돼 있다. 물론 신세계 스타필드는 '의자를 갖춤'으로써 해당 법령을 어기지 않았지만, 실질적으로 노동자의 편리는 개선되지 않아 '구색'만 갖추려 했단 비난을 피하기 어려워졌다. 노동자들이 장시간 입식 작업으로 요통 등을 호소할 수 있다. 회사는 계산대 구조를 바꾸든 계산대를 더 늘리든 갖은 수단을 취해, 노동자들이 진정으로 '좌식'과 '입식' 가운데 작업방식을 취사선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와 관련해 한인임 전국서비스산업노동조합연맹(감정노동전국네트워크) 정책연구팀장은 "혁신을 지향해온 신세계는 되레 노동자 권리 보장엔 소극적이었다"면서 "단순히 법령을 준수하는 것에서 끝나면 안 된다"고 밝혔다.

의자를 곁에 두고 앉지 않고 서서 일하는 트레이더스 계산원. (사진=신민경 기자)
의자를 곁에 두고 앉지 않고 서서 일하는 트레이더스 계산원. (사진=신민경 기자)

김재희 법무법인 보인 변호사도 "공고조항이 명시한 바와 달리 실질적으로 좌식업무가 불가한 환경이라면, 이를 가능케 하는 방향으로 사측이 조치를 취할 여지가 충분하다"고 밝혔다.

또 한국노동사회연구소의 '유통서비스 판매직 노동자 건강실태조사'에서 김종진 연구위원은 "독일 등 해외 선진국의 경우 의자를 비치하는 것은 물론 그 높이를 계산대에 맞추도록 권장해 노동자가 앉아서 근로하는 것도 가능하다"며 "노동자 입장에서 휴식과 건강을 위해 꼭 필요한 조건이 무엇인지 실태조사부터 한 뒤 실효성 있는 규제를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유통혁신 선두'로 소비자 선호 얻은 신세계..."노동자 근무환경 혁신에도 힘써야"

정 부회장은 지난해 6월 하남 지점에 방문한 김동연 당시 경제부총리 등과 '혁신성장 현장소통'을 논하는 자리에서 "향후 3년간 약 9조원을 투자하고 매년 1만명 이상 신규 채용하겠다"고 언급한 바 있다. 정 부회장은 이때 "신세계와 협력업체의 성장 외에도 우리 사회 소외계층까지 배려해 모두가 상생할 수 있는 사업모델과 시스템 구축에 힘쓸 것"이라고 약속했다. 실제로 스타필드 하남 직원 가운데 60%는 하남 시민이다. 하지만 고용 이후 불편한 근무환경이 뒤따른다면 이는 '반쪽짜리 고용'에 불과하다.

스타필드에서 한나절을 보내는 동안, 소비자에게 관대하고 노동자에게 엄격한 신세계의 일면을 본 것 같아 씁쓸했다. 개인 인스타그램을 통해 의류와 식품 등 유행에 밝은 모습을 보이며 소비자에게 친근하게 다가갔던 정 부회장의 진정성이 의심되기도 했다.

이혁재 정의당 공정경제민생본부 집행위원장은 디지털투데이에 "높은 매출액과 소비자 선호도를 담보하는 신세계 스타필드가 그에 걸맞은 노동자 근무환경을 조성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라며 "의자 비치와 물품 적재 등에 관해 편법적이고 강압적인 모습을 보일 것이 아니라, 안전 위해 요소를 전부 제거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어 이 집행위원장은 "노동자들의 도구도 첨단화할 필요가 있으며, 산업현장 내 암묵적 갑질이 용인될 수 없는 사회가 도래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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