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투데이 신민경 기자] 유통 대기업인 롯데그룹과 CJ그룹이 '여성임원 늘리기'에 앞장서고 있다. 과거와는 확연히 다른 행보다. 앞서 신격호 롯데 명예회장은 딸 2명을 배제한 채 신동주와 신동빈 사이에서 경영권 대물림을 고민했다. CJ그룹에선 이맹희의 장남 이재현이 장손으로서 경영권을 갖게 됐고, 뒤이을 후계자로는 이재현의 장남 이선호가 유력한 상황이다. 하지만 두 기업은 최근 매년 정기 임원인사에서 여성 임원 수를 지속적으로 확대하고, 여직원 사기를 북돋우는 행사를 마련하는 등 변모를 꾀하는 중이다. 변화된 행보는 성과주의에 집중함으로써 투명·혁신 경영을 실천하기 위함이란 분석이 나온다. 

수년에 걸쳐 롯데에서 벌어지고 있는 형제갈등은 여성의 경영권 배제를 전제로 한다. 신격호 롯데 명예회장의 배 다른 자식 4명은 롯데총수일가란 이름 아래 하나의 가족으로 묶였다. 장녀인 신영자(롯데복지재단 이사장)는 신 명예회장이 본처 노순화와의 사이에서 낳은 혈육이다. 신동주 전 일본롯데홀딩스 부회장과 신동빈 롯데 회장의 어머니는 둘째 부인인 시게미쓰 하쓰코다. 셋째 부인인 서미경이 낳은 딸 신유미는 '법적 언니'인 신영자와 41살의 나이차가 난다. 신영자는 계모 뻘인 서미경보다 24살 많다. 이런 가족 구도 사이에서 먼저 태어난 신영자는 그룹 경영권 일선에서 배제됐고, 롯데 관련해서는 '신동주-신동빈'의 형제 간 갈등만이 대두됐다. 최근엔 신 전 부회장이 신 회장에 '형제 간 경영권 다툼을 멈추고 롯데를 일본으로부터 독립시켜 분리경영을 하자'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지만, 신 회장은 이를 고사했다.

CJ그룹의 경영권 승계에도 남아선호 풍조가 반영돼 왔다. 이병철 삼성전자 창업주의 장남 이맹희는 경기도지사를 지낸 손영기의 딸인 손복남과 결혼했다. 그리고 이 둘은 딸 이미경과 아들 이재현(CJ 회장), 이재휘을 낳았다. 이미경과 이 회장은 두 살 터울의 남매로, 이미경이 누나다. 이재환(CJ파워캐스트 대표)은 차남으로 올해 58세다. 장손을 중시하는 삼성가답게, 장남 이 회장이 삼성그룹의 제일제당에 입사하며 경영연습을 시작했다. 이 회장은 약 7년간 제일제당 경리부와 기획관리부에서 일을 한 후 지난 1993년 삼성전자 전략기획실 이사로 발령 받았다. 이후 제일제당에서 상무이사 5년, 부사장 1년을 거쳐 2002년부터 CJ그룹의 꼭대기에 올랐다. 첫째로 태어났던 이미경의 경우 지난 1995년 CJ제일제당에 입사해 현재는 CJ그룹 부회장직을 맡았다. 이재현-김희재 부부의 승계 역시 비슷한 모양새를 띌 것으로 전망된다. 장녀인 이경후는 CJ ENM에서 브랜드전략 담당 상무로 지내고 있으며, 그보다 5살 어린 이선호는 CJ제일제당 마케팅담당 부장으로 있다. 이들의 3세 경영권 승계 작업엔 지분 최다 보유 계열사인 CJ올리브네트웍스가 변수가 될 것으로 읽힌다. CJ올리브네트웍스에 대해 이선호는 지분 17.97%, 이경후는 6.91% 갖고 있다.

(차세대 여성리더들과 함께하는) 영화 헬렌의 도전 특별상영회 및 토크콘서트 ⓒCJ그룹
(차세대 여성리더들과 함께하는) 영화 헬렌의 도전 특별상영회 및 토크콘서트 ⓒCJ그룹

이처럼 남아선호·장자승계 원칙이 확고했던 롯데와 CJ에 최근 임원 성비에 변화의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양사의 여성임원 비율 변화는 크게 성과주의와 경영투명성으로 집약된다. 급변하는 대외 환경과 윤리·투명 경영이 강화됨에 따라 그룹의 전반적인 혁신을 꾀한 것으로 보인다. 

먼저 롯데의 경우 지난 2006년부터 여성 인재 채용에 주력해오고 있다. 2016년에 신입사원 가운데 여성 입사자 수를 40%까지 늘렸다. 롯데는 지난 2012년 내부 승진을 통해 그룹 내 최초로 여성 임원 3명을 배출한 바 있다. 이어 2017년에는 신규·승진 여성임원 21명을 발표했고 이듬해 초 단행된 인사에선 30명이 선임됐다. 이때는 그룹 역사 상 처음으로 여성 CEO가 나왔다. 선우영 롯데하이마트 온라인부문장이 롯데 롭스의 대표로 선임된 것. 신 회장은 앞선 2015년 열린 와우포럼에서 "오는 2020년까지 반드시 여성 CEO를 배출하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

그리고 지난해 12월 발표된 2019년 인사에서 여성임원 총 수는 36명이 됐다. 3명 배출된 지난 2012년과 비교했을 때 6년 만에 12배 증가한 것은 괄목할만한 변화다. 롯데지주 관계자는 "그룹 내 전체 임원 수는 약 500명에 육박한다. 이 가운데 여성임원은 점점 늘어나는 추세다. 올해 발표된 인원은 36명으로 7%의 자리를 확보한 셈이다"고 말했다.

신 회장은 지난 2017년 9월 서울 잠실 롯데월드타워 시그니엘서울에서 열린 롯데그룹 여성임원 간담회에서 "시일 내로 여성 CEO가 배출될 수 있도록 더욱 노력해달라"고 주문했다. "여성 인재들이 능력과 자질만 갖춘다면 그룹 내에서 유리천장의 벽을 느끼게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고도 했다. 또 황각규 롯데 부회장은 지난해 말 서울 잠실 롯데호텔월드에서 열린 '제7회 롯데 와우포럼'에서 "올해 처음 여성 CEO를 배출한 만큼 앞으로 여성임원을 보다 확대·육성할 예정이다"며 "여성 인재들이 적극적으로 도전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앞서 롯데는 신 회장의 뜻에 따라 여성인재 육성정책과 직장 내 육아문화 마련에 힘쓰고 있다. 지난 2012년 여성 자동육아휴직제 도입을 시작으로 여성육아휴직 기간 최대 2년 연장, 유연근무제·PC자동오프제 도입, 육아휴직자 복직 프로그램 운영 등 갖은 정책을 전개하고 있다. 

CJ는 여성임원 비중이 높은 기업으로 꾸준히 상위권을 유지해왔다. 올해엔 손은경 CJ제일제당 식품마케팅본부장과 김소영 바이오기술연구소장이 부사장 대우로 승진 임명됐다. CJ그룹 역사상 그룹 내부 출신 여직원이 부사장 직급으로 발탁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들의 부사장 승진은 가시적인 성과를 내는 여직원에겐 적극 지원을 하겠다는 회사의 의도를 반영한 것으로 읽힌다.

이번 인사에서 여성 승진 임원은 총 10명으로 전체 승진자의 13%를 차지했다. CJ제일제당에서 오지영 식품연구소 전문임원, 이주은 상온 HMR 마케팅담당이 발탁됐고 CJ ENM에서는 김제현 미디어사업부문 채널사업부장과 한승아 주식회사 가치경영담당이 신임임원으로 발표됐다.

이와 관련해 CJ는 "놀랄 만한 성과가 나타난 성과부문에서 여성 승진자가 발생했다"면서 "'성과 있는 곳에 승진 있다'는 기본원칙에 충실하고자 한 인사"라고 설명했다.

또 지난 13일엔 헬렌 클라크(Helen Clark) 전 뉴질랜드 총리가 CJ 직원들과 만나 글로벌 여성 리더십에 관해 이야기 나누는 시간을 갖기도 했다. 이날 오후 서울 CGV용산아이파크몰에선 CJ사회공헌추진단과 주한 뉴질랜드대사관이 공동 주최한 '(차세대 여성리더들과 함께하는) 영화 헬렌의 도전 특별상영회 및 토크콘서트'가 진행됐다. CJ 임·직원 80명과 주한 뉴질랜드 대사관 관계자 40명, 여성 직장인과 대학생 200여명이 참석했다. 참석자들은 지난 2016년 최초 유엔 여성 사무총장에 도전한 헬렌 클라크의 삶을 기록한 영화를 보고, 여성의 사회적 역할과 해외 리더십에 관한 담론을 나눴다.

CJ는 지난해 기준 국내 30대 기업 가운데 여성임원 비율이 가장 높은 기업으로 꼽힌다. 전체 임·직원의 40% 이상이 여성이다. CJ 측 관계자는 "생활문화기업으로서 소비자들과의 접점이 많은데 이런 점에서 여성의 시각에서 해결할 수 있는 부분들이 많다"면서 "인사에서도 남성과 여성 등 성별을 구분하지 않고 성과를 기반으로 평가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회사는 일과 가정의 양립을 중시하고 있다"며 "여성들이 사회생활을 함에 있어 육아 등으로 불편함이 없도록 출산휴가·각종사내육아제도 등 여성친화제도를 다수 시행 중이다"고 설명했다.

이인석 서강대학교 경영대학 교수는 "여성임원 수를 늘린다는 것은 성과주의와 투명·혁신 경영을 동시에 꾀한다는 점에서 기업의 질적 공리주의가 실현으로 볼 수도 있다"면서 "외형적으로 볼 때 양사의 시도는 바람직한 현상이다"고 했다. 반면 "윤리적으로 지탄을 받고 있는 두 기업이 정부가 정한 공공기관 인사지침 '여성비율 30%'를 적극적으로 지키려고 한다는 점에서 합리적 의심도 가능하다. 정부의 권고에 맞추려는 '보여주기'식 약속인지 혹은 일관된 기업 차원의 노력이 반영될 것인지는 지켜봐야 한다"며 언론의 감시 기능을 강조했다.

키워드

#롯데 #CJ
저작권자 © 디지털투데이 (DigitalToday)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