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투데이 신민경 기자] 재계에 장자승계 원칙과 남아선호 사상이 뿌리 깊다. 코오롱그룹은 이원만 창업주에서 아들인 이동찬으로 경영권이 승계됐고, 이동찬은 자식들 가운데 아들인 이웅렬에 후계자 자리를 내줬다. 이웅렬 역시 장남인 이규호에 경영권을 쥐어줄 것으로 보인다.

신격호 롯데그룹 회장도 딸 2명을 배제한 채 신동주와 신동빈 사이에서 경영권 대물림을 고민했다. LG그룹도 장자승계 전통을 이어 받아 구본무의 자식들 가운데 구광모가 회장으로 추대됐다. CJ그룹에선 이맹희의 장남 이재현이 장손으로서 경영권을 갖게 됐고, 뒤이을 후계자로는 이재현의 장남 이선호가 유력하다.

이처럼 대부분의 그룹 경영권 승계와 인사에서 여성이 주요하게 거론되지 않는 데 대해 일각에선 "일정 여성임원 비율을 확정하는 정책 입법화와 공론화를 통해 민간부문의 동참을 이끌어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코오롱그룹은 창업주 작고부터 최근까지 장자승계 원칙을 따랐다. 코오롱의 창업주는 이원만이다. 그는 지난 1935년 아사히공예주식회사를 세워 2년 후엔 '아사히피복주식회사'로 사명을 바꿔달았다. 동생인 이원천 한국나일론 사장과 아들 이동찬 코오롱 명예회장을 회사로 호출해 협력토록 했다. 하지만 그룹 승계 주인을 정할 때가 되자 이동찬과 이원천은 경영권을 놓고 분쟁을 벌였다. 

이때부터 이원만은 자식들 가운데 딸뿐만 아니라 차남, 사위와 친인척 등 가족이 경영에 참여하는 것을 금지했다. 이동찬이 지난 1977년부터 1995년까지 코오롱의 회장직을 맡았다. 그는 슬하에 1남5녀를 뒀지만 남아 선호로 인해 외아들인 이웅렬을 후계자로 채택했다. 이웅렬은 이듬해 1월부터 바로 회장직을 물려받아 경영권의 정점에 섰다. 또 이웅렬은 슬하에 1남2녀를 뒀으나 장남인 이규호만 경영에 참여하게 했다.

이규호는 지난해 말부터 코오롱인터스트리 FnC부문 최고운영책임자(COO)로 임명돼 패션사업을 지휘 중이다. 장자승계 경향이 뚜렷했던 만큼 끝내는 이규호가 그룹 경영권의 바통을 넘겨 받아 회장직에 오를 것으로 읽힌다. 그룹 측은 이규호의 승진을 밝힐 당시 "이 회장이 이 신임 전무에게 바로 그룹 경영권을 물려주는 대신 그룹의 핵심 사업부문을 총괄 운영하도록 해 본격적으로 경영에 참여토록 했다"며 "그룹을 이끌 때까지 경영 경험과 능력을 충실하게 쌓아가야 한다"고도 했다.

지난 13일 CJ그룹의 직원들이 '헬렌 클라크와 함께하는 무비토크' 행사에서 여성 리더십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CJ그룹
지난 13일 CJ그룹의 직원들이 '헬렌 클라크와 함께하는 무비토크' 행사에서 여성 리더십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CJ그룹

롯데그룹에서 벌어지고 있는 형제갈등도 여성의 경영권 배제를 전제로 한다. 신격호 롯데그룹 명예회장의 배 다른 자식 넷은 롯데총수일가란 이름 아래 하나의 가족으로 묶였다. 장녀인 신영자(롯데복지재단 이사장)는 신격호가 본처 노순화와의 사이에서 낳은 유일한 혈육이다. 신동주(광윤사 대표이사, 전 일본롯데홀딩스 부회장)와 신동빈(롯데 회장)의 어머니는 둘째 부인인 시게미쓰 하쓰코다. 셋째 부인인 서미경이 낳은 딸 신유미는 '법적 언니'인 신영자와 41살의 나이차가 난다. 신영자는 계모 뻘인 서미경보다 24살 많다. 이런 가족 구도 사이에서 먼저 태어난 신영자는 그룹 경영권 일선에서 배제됐고, 롯데 관련해서는 '신동주-신동빈'의 형제 간 갈등이 대두됐다. 최근엔 신 전 부회장이 신 회장에 '형제 간 경영권 다툼을 멈추고 롯데를 일본으로부터 독립시켜 분리경영을 하자'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지만, 신 회장은 이를 고사했다.

LG그룹은 유교에 기반을 둔 장자승계 전통으로 유명하다. 지난해 11월 LG에 따르면 구광모는 LG의 최대주주로 올라서며 실질적인 그룹 경영권을 갖게 됐다. 구 회장은 구본무 전 회장의 유일한 아들이다. 친부는 구본능 희성그룹 회장이나 그룹 내 장자승계원칙을 위해 구본무 회장의 양자로 입적됐다. 구 회장은 승계 과정에서 고(故) 구본무 전 회장의 보유 주식 11.28% 가운데 8.76%를 상속받았다. LG CNS 지분 1.12%도 구 회장에게 상속됐다. 장녀 구연경과 차녀 구연수에게는 LG 주식이 각각 2.0%과 0.5%만 상속됐다. 구광모와 구연경은 같은 1978년생이나, 이 가운데 구광모가 경영권 후계자로 선택받았고 주식도 많은 부분 배당받았다. 가풍에 따라 구연경과 구연수는 LG그룹 경영에 일절 개입하지 않고 있다.

현대백화점그룹도 승계에 관해선 아우보다 형이 먼저다.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의 셋째 아들 정몽근은 현재 현대백화점 명예회장이다. 그와 우경숙은 슬하에 아들 둘을 뒀는데 장남은 정지선, 차남은 정교선이다. 정지선과 정교선은 현재 각각 현대백화점그룹의 회장과 부회장을 맡고 있다.

CJ그룹의 경영권 승계에도 남아선호 풍조가 반영된 듯하다. 이병철 삼성전자 창업주의 장남 이맹희는 경기도지사를 지낸 손영기의 딸인 손복남과 결혼했다. 그리고 이 둘은 딸 이미경과 아들 이재현, 이재휘을 낳았다. 이미경과 이재현은 두 살 터울의 남매로, 이미경이 누나다. 이재환(CJ파워캐스트 대표)은 차남으로 올해 58세다. 장손을 중시하는 삼성가답게, 장남 이재현이 삼성그룹의 제일제당에 입사하며 경영연습을 시작했다. 이재현은 약 7년간 제일제당 경리부와 기획관리부에서 일을 한 후 지난 1993년 삼성전자 전략기획실 이사로 발령 받았다. 이후 제일제당에서 상무이사 5년, 부사장 1년을 거쳐 2002년부터 CJ그룹의 꼭대기에 올랐다. 첫째로 태어났던 이미경의 경우 지난 1995년 CJ제일제당에 입사해 현재는 CJ그룹 부회장직을 맡았다. 이재현-김희재 부부의 승계 역시 비슷한 모양새를 띌 것으로 전망된다. 장녀인 이경후는 CJ ENM에서 브랜드전략 담당 상무로 지내고 있으며, 그보다 5살 어린 이선호는 CJ제일제당 마케팅담당 부장으로 있다. 이들의 3세 경영권 승계 작업엔 지분 최다 보유 계열사인 CJ올리브네트웍스가 변수가 될 것으로 읽힌다. CJ올리브네트웍스에 대해 이선호는 지분 17.97%, 이경후는 6.91% 갖고 있다.

한국CXO연구소가 진행한 '국내 200대 그룹 내 40대 이하 총수일가 현황 조사'에 따르면 200대 그룹에서 확약하는 40대 총수일가 임원은 130명에 달한다. 반면 여성임원은 20명(15.4%)에 불과했다. 이가운데 사장급은 2명으로,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과 정유경 신세계 사장이 해당됐다. 이처럼 재계 총수일가의 가업 승계자와 임원들 사이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비율은 여전히 적다.

이에 대해 이영숙 전국식품산업노동조합연맹 여성부위원장은 "구광모 LG그룹 회장도 상속세 수천억을 성실히 납부한다는 이유만으로 착한 세습을 한다고 일컬어진다. 하지만 이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들 재계의 습관적 경영권 세습에 여성은 거론조차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또 소유와 경영을 분리한 경우에도 전문경영인들 가운데 여성의 숫자는 손에 꼽는다. 회사는 오너일가 개개인의 것이 아니라 주주들의 것이다. 주주들이 공론화 등을 통해 그룹 내 능력 있는 여성임원의 비중을 늘리는 데 역할을 다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어 "수면 위로 올라오지 않은 기업 내 여성의 유리천장 문제를 정책의 힘을 빌려서라도 쟁점화시키는 게 중요하다"며 정책 입안의 가능성도 시사했다.

공공기관 인사지침에 의하면 비상임이사 여성비율은 30%를 넘어야 한다. 하지만 이는 권고 조항에 불과하므로 실효는 없다. 이와 관련해 진형혜 법무법인 지엘 변호사(한국여성변호사회 사무총장)는 "국내 10대 대기업과 5대 정부 핵심 부처만 살펴봐도 여성 임원과 국장급 인사는 거의 전무하다. 임원비율이 30%로 권고되고 있지만, 실상은 남녀 동수가 이뤄져야 한다. 이는 여성 전체의 숙원사업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이어 진 변호사는 "민간부문인 재계의 승계와 인사권에 대해서 관여하는 것은 월권이다"면서도 "공공부문에서 여성임원 비율을 확대하는 모습을 선도적으로 보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부가 일정한 여성임원 비율을 정해 입법화하고 이에 관한 공공부문의 이행여부를 시민단체가 감시한다면, 민간부문에서의 동참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얘기다. 그는 "공공부문 입법화를 통해 사회적인 문제 의식과 여론 형성을 주도하는 게 관건이다"며 여성임원 비율 증가를 위한 입법화·공론화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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