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투데이 신민경 기자] 지난 10일 서울 서대문 신촌세브란스병원에서 가습기살균제의 피해자 안은주씨를 만났다. 이날은 경남 밀양에 사는 안 씨가 병원 정기 검진을 받기 위해 상경한 날이다. 병원 3층 안내데스크 앞 로비에서 만난 안 씨의 첫인상에는 여러 감정이 함께 존재했다. 그는 알루미늄 산소통을 담은 산소운반차를 곁에 두고 콧줄을 통해 산소를 공급 받고 있었다. 가볍게 숨을 들이쉬는 것조차도 고단해 보였다. 하지만 그가 끌어 안고 있는 신체적 어려움과 달리, 말과 행동에서는 대범함과 초연함이 잔뜩 묻어났다. 국가대표 배구선수 출신다웠다. 건강하고 맵시 있는 신체를 타고났던 그는 3년 동안 옥시 제품을 사용한 '죄'로 일순간 쓰러져 폐이식 수술을 받게 됐다.

안 씨는 "지난해부터 산소통(의료용 산소호흡기)의 당일 충전이 불가능하게 됐다. 이전까지는 충전소에 맡기면 당일 찾아올 수 있었는데, 이제는 무조건 하루를 기다려야 한다. 나는 밀양에 거주하지만 창원 소재 충전소를 이용하는데, 산소통을 맡기고 다음 날 또 찾으러 가야 하는 불편함이 생겼다. 왕복 100km거리다. 생명줄과도 같은 산소통의 당일 충전이 제도적으로 제한되니, 응급상황도 더 잦아졌다. 해당 사안에 대해 환경부 측은 책임 전가만 하고 있는 것 같다"며 불편함을 드러냈다.

그는 정부로부터 3단계 피해자로 분류된 후 산소통을 달고 사는 현재까지 아무런 지원도 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국가적 재난이나 참사는 한 번 일어나면 생존자든 사망자든 모두 피해자로 간주한다. 하지만 가습기살균제 참사는 한날한시 일어난 일이 아니다. 지난 1994년 유통되기 시작한 제품을 일정 기간 쓴 사람들이 저마다 다른 증상과 질환을 보이고 있다. 피해자들이 피해 사실 자체만으로 규정되기도 어렵고 한 곳으로 집단 차원에서 한 목소리를 내기도 버거운 상황이다. 3단계 피해자로서 이 모든 상황이 답답하게 느껴질 뿐이다"고 말했다.

가습기살균제 3단계 피해자 안은주씨가 늘 수반하는 의료용산소호흡기 ⓒ신민경 기자
가습기살균제 3단계 피해자 안은주씨가 늘 수반하는 의료용 산소호흡기 ⓒ신민경 기자

정부, 약자(가습기살균제 피해자) 쪼개 또다른 약자(3·4단계 피해자) 만들어

가습기살균제로 인해 피해를 겪은 사람들은 크게 4단위로 나뉜다. 1·2단계는 인정받은 피해자를 일컫고 3·4단계는 인정받지 못한 피해자를 가리킨다. 보상을 받아야 할 사람들로만 구성된 피해자 무리를 수혜집단과 비수혜집단으로 나눔으로써, 정부는 다수의 피해자들을 다시 '소외의 늪'에 빠뜨렸다.

질병관리본부는 지난 2013년 7월부터 가습기살균제 폐손상 의심 접수사례 542명 가운데 조사거부와 연락불가 사례 등을 제외한 361명에 대한 개인별 조사를 실시했다. 8개월간의 조사 끝에 정부는 '가습기살균제로 인한 폐손상 여부'라는 기준 하나만으로 피해자들을 4단계로 나눠버렸다. 당시 조사에 응한 361명은 폐손상이 거의 확실한 사례 127명, 가능성이 높은 사례 41명, 가능성이 낮은 사례 42명, 가능성이 거의 없는 사례 144명으로 분류됐다.

환경부는 이같은 분류결과를 2014년 4월 환경보건위원회에 상정해 1·2단계 판정을 받은 피해자 168명에 대해 의료비, 장례비 등을 지급키로 결정했다. 하지만 가능성 낮음과 가능성 거의 없음 판정을 팓은 3·4단계 피해자들은 정부지원금 지급 대상에서 완전히 누락됐다. 

이후 환경부는 2014년 4월부터 10월까지 2차 피해조사를 벌여 169명(생존 125명·사망 44명)의 추가 피해를 확인했다. 이듬해 2월부터 12월까지는 3차 피해조사를 통해 생존 666명과 사망 86명의 합인 752명의 추가 피해 사례를 확보했다. 그리고 지지난해인 2016년 4월 25일부터 현재까지 4차 피해조사가 진행 중이다. 올해 12월 14일 기준 4차 피해조사에서는 생존 3823명과 사망 1134명으로 도합 4957명의 피해자가 추가 확인됐다. 다시 말해, 지난 2011년 11월부터 현재까지(12월 14일 기준) 약 7년간 네 차례 벌인 피해조사를 통해 확인된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는 총 6239명이다. 이 가운데 생존자는 4865명일 뿐, 나머지 1374명은 사망자다. 피해사례가 추가로 확보될 때마다 사망자 수치도 꾸준히 늘고 있다.

질환별로 보면 1차부터 4차 피해조사까지 폐질환 건강피해를 겪은 이들은 총 5253명으로 이중에서 468명만 정부 지원금 대상이다. 또 태아 피해자는 52명으로 드러났으며 절반인 26명이 지원금을 받게 됐다. 천식피해자는 총 4329명인 데 반해 195명만이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로 인정 받은 상황이다. 앞서 지난 8월 환경부는 제48회 국정현안점검조정회의에서 기존에 폐질환 건강피해만 구제 질환으로 인정하던 것에서 범위를 확대해 폐렴과 간염, 천식 등도 추가하겠다고 발표한 바 있다.

ⓒ환경부, 폐손상조사위원회 공동위원장 백도명 교수 발표자료
ⓒ환경부, 폐손상조사위원회 공동위원장 백도명 교수 발표자료

지난 정부까지는 1·2단계 피해자들만 지원을 받았다. 하지만 정권이 바뀐 후 지난해 9월 11일 열린 가습기살균제 피해 구제계정운용위원회가 제3차 회의에서 처음으로 구제급여 지원 대상 범위를 3단계까지 확대키로 결정했다. 이로써 폐섬유화 손상 가능성이 낮다고 판단돼 정부 지원을 받지 못하던 3단계 피해자들의 구제 길은 열렸다. 하지만 피해자들이 다수 포진한 4단계는 아직도 정부 지원의 사각지대에 머물고 있는 실정이다. 구제계정운용위원회는 가습기살균제 피해 특별구제계정의 관리운용과 인정신청자 등에 대한 지원여부를 심의 결정하는 기구다. 이때 특별구제계정은 정부 출연금과 옥시, SK이노베이션, 애경산업, 롯데쇼핑, LG생건, GS리테일, SK디스커버리, 한빛화학 등 가해기업 18곳의 부담금 1250억원을 통해 운용되며, 피해자로 분류됐지만 3·4단계라서 지원은 못 받았던 이들을 위해 쓰인다.

"애경·SK디스커버리는 스스로 가해기업 인식 가져야"

최근 가습기살균제 폐렴과 천식 피해자 794명이 특별구제 대상자로 추가 선정됐다. 한국환경산업기술원과 환경부는 지난 12일 열린 제13차 구제계정운용위원회에서 이같은 항목을 담은 '폐렴·천식 구제급여 상당지원 심사기준'을 심의·의결했다. 이로써 가습기살균제와 유관한 폐렴 질환자 733명과 천식 질환자 61명, 총 794명이 지원대상자로 추가 인정됐다. 이들은 가해기업들이 낸 부담금을 지원받을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시민단체와 피해자는 여전히 초조해하는 모양새다. 정부 차원의 '추가 피해자 찾기'에 보다 속도가 붙어야 한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정동엽 참여연대 선임간사는 "정부는 피해자 등급을 매기는 데 있어서 여전히 방어적이다. 클로로메틸이소티아졸리논(CMIT)와 메틸이소티아졸리논(MIT) 등 원료물질은 흡입할 경우 인체의 장기나 피부 등에도 치명적이다. 하지만 폐질환과 호흡기질환자를 최우선 고려선상에 두는 경향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그리고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를 가려내는 방법과 기준이 애매하고 공평하지 않다. 피해자를 가려내는 절차 자체가 입증책임의 화살을 피해자에게만 놓아두는 것과 같다. 가습기를 썼고 그로 인한 피해가 현재의 증상임을 환자가 직접 증명해야 하는데, 처음 유통이 개시된지 24년이나 지난 지금 인과관계를 뒷받침할 근거가 없는 사람들이 대다수다"고 말했다. 이어 정 간사는 "검찰은 직무유기로 의심되는 행동을 지속해왔다. 부담금도 피해를 끼친 정도에 비해 적게 책정된 과징금이 됐다. CMIT와 MIT의 유해성을 검증하는 자료가 국내외로 많이 나오고 있는데, 이전 쥐독성실험에서 유해성이 입증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수사를 개시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해되지 않는다. 다분히 의도적이다"고 전했다.

정 간사는 "피해자가 있는데 가해자가 없을 수는 없다. 애경산업과 SK디스커버리는 자사가 가해기업이라는 인식을 받아들이고 견뎌야 한다. 이들이 가습기살균제 참사에 있어서 자사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곧 피해자들을 피해자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과 같다. 피해자의 억울하고 답답한 마음을 헤아려야 한다. 이런 참사가 나올 경우 기업 측에서는 자사가 해당 제품을 얼마나 많이 팔았는지 직접 밝히고 피해규모 추산에 적극 나섰어야 했다. 굴지의 대기업으로서 사회적 참사에 대한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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