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내 반도체 설계(팹리스) 업체 A사는 한 반도체 대기업과 공동 연구개발(R&D) 프로젝트를 진행했다가 뼈아픈 경험을 했다. R&D 프로젝트를 함께 진행했던 핵심 인력 9명이 한번에 해당 기업으로 이직한 데 이어 프로젝트마저 무산됐기 때문이다. 

#최근 국내 팹리스 B사는 삼성전자의 대규모 채용 계획이 발표된 후 인력 이탈에 대한 대비책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동종업계 재취업 및 창업 금지 규정을 도입하기 위한 절차를 밟는 한편 복지나 근무 환경, 처우 등의 개선 방안을 논의 중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반도체 대기업이 대규모 인력 채용을 하면서 반도체 업계에 비상이 걸렸다. 인재 수급이 어려워지는 것은 물론 인력 유출의 가능성이 커져서다.

B사 대표는 “대기업은 물론 네이버·다음 등 타 IT기업들도 반도체 인력을 모집하면서 인력 수급과 인력 유출 문제가 업계 최대의 화두가 됐다”며 “다른 업체들도 상황은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같은 움직임은 사실상 무용지물이라고 업계는 입을 모은다. 현실적으로 중소기업이 대기업 정도의 처우를 해주기는 어렵고, 재취업 금지 조항으로 이직을 막는 것도 한계가 있다는 설명이다.

반도체 장비 업체 C사 대표는 “중소기업에서 경력을 쌓아 대기업으로 이직하는 게 일종의 수순이라 조항 자체에 거부감을 갖는 경우가 많다”며 “재취업 금지 조항도 시간이 지나면 무효가 되는데다, 이직이 어렵다고 하면 우수 인재 수급이 어려운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혈류 막힌 반도체 생태계

1990년대부터 2000년대 국내에 메모리, 디스플레이, 스마트폰 등 다양한 IT 산업 생태계가 형성될 수 있었던 데는 시스템 반도체 개발사의 역할이 컸다.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사태로 인한 구조조정과 LG반도체·현대전자간 합병 빅딜 과정에서 대기업 시스템반도체 개발 인력이 쏟아져 나와 창업을 했다.

디스플레이 구동칩(DDI)과 타이밍컨트롤러(T-con), 피처폰 두뇌 역할을 하는 멀티프로세서(MCP), 보조메모리, 터치센서 등 IT 제품 구동을 위한 핵심 기술들이 국내에서 개발돼 신뢰성이 높으면서 가격이 저렴한 반도체 부품이 대거 공급됐다.

이같은 생태계는 인재 양상의 요람이 됐다.  

인력 유출에 전방산업 불황까지 겹치면서 생태계는 급속도로 무너지는 모양새다. 

최근 중소기업 팹리스 업체에서 인력을 빼가는 곳은 주로 국내 고객사다. 실제 앞서 사례에서 핵심 인력 3분의1을 대기업에 빼앗긴 A사는 인력 수급 문제에 시달리거나 고객사와의 관계가 틀어지는 것을 우려,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못했다. 

A사 대표는 “법적 대응에 필요한 시간이나 비용도 부담이지만 무엇보다 가장 걸리는 것은 해당 기업이 고객사라는 것”이라며 “만약 법적으로 문제를 삼아 일을 키우면  거래는 물론 추후 프로젝트가 중단되거나 미뤄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말했다.

프로젝트 중단에 따른 손해는 중소기업이 감당해야 하고, 신규 인력을 채용해 교육하면서 고객사 눈치까지 봐야하는 이중삼중고를 겪는다.

중소기업의 수익성하락은 임금 격차까지 벌리고 있다. 지난해 기준 삼성전자 직원 평균 연봉은 약 1억1700만원, SK하이닉스 직원 평균 연봉은 약 8498만원이다. 팹리스 업계에서 중견급으로 분류되는 텔레칩스(7311만원)나 티엘아이(5600만원)보다 1000만원 이상 높다. 

C사 인사 담당자는 “대기업 인력 투자 계획이 발표된 후 현장 인력들의 마음은 이미 붕 떠있다”며 “올해는 인력 이탈을 감안, 대기업보다 일찍 채용 공고를 띄울 계획”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근본적인 대책을 각 기업이 찾기에는 생태계 구조적인 문제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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