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전 취재 때문에 강원도 양양을 찾았던 때가 생각난다. 3월 중순의 양양은 아직 겨울에서 채 벗어나지 못한 모습이었다. 여름이 아니고서야 특별할 것 없이 조용하게 지낼 수 있는 바닷가 마을이겠구나 싶었다. 그래도 파도만큼은 제법 멋있게 부서지던 게 아직 눈에 선하다.

바닷가를 따라 쭉 올라가는 중, 기사문 해변 근처에서 서퍼를 봤다. 온통 검정 일색의 두꺼운 슈트를 입고, 아무런 망설임 없이 그 차가운 바닷속으로 향했다. 보드 위에 몸을 얹고 가뿐하게 팔을 저어 먼바다까지 나아가는 모습에 감탄이 저절로 나왔다. 공기 중에 있어도 제법 쌀쌀한 날이었기에 놀라움은 더했다.

그런 풍경을 마음 한구석에 품은 후로 몇 년이 지났다. 언젠가부터 양양의 소문이 전해져오기 시작했다. 힙스터(유행을 좇는 사람)들이 양양을 찾고 있다고 했다. 단 한 가지 목적, 서핑을 위해서. 주말 밤마다 파티가 펼쳐지고, 서핑보드 위에서 파도를 제대로 즐기는 사람들이 넘쳐난다고 들었다. 기억 속 양양과는 다른 모습에 호기심이 동해 검색을 해 보았다. 이미 내가 아는 양양이 아니었다. 얼마나 달라졌는지 직접 가 보기로 했다.

김민정 여기어때 액큐가 패들보드를 타고 있다.(사진=여기어때)
김민정 여기어때 액큐가 패들보드를 타고 있다.(사진=여기어때)

서핑 좀 한다는 친구의 추천을 받아 찾은 곳은 죽도해변이었다. 양양의 시내를 지날 때는 5년 전과 달라진 것이 거의 없었지만, 바닷가에 도착하니 분위기가 바뀌었다. 새파란 바다 앞에 늘어선 서핑숍들, 인테리어가 범상치 않은 맛집들, 색색의 서핑보드들, 여기저기 널려 말라가고 있는 슈트와 보드들까지. 뭔가 달라졌다, 완전히.
 
달라진 분위기를 적극적으로 느껴보기 위해 서핑을 배워보기로 했다. 죽도해변 바로 코앞에 있는 서핑숍, 서프오션에서 오늘의 선생님을 만났다. 배럴 팀 라이더로 활동하고 있는 정대현 서퍼. 예사롭지 않은 차림새로 오토바이를 타고 등장한 분이 있었는데, 바로 그분이었다.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슈트를 챙겨입고 오자 바로 강습이 시작됐다.

강습은 총 3단계로 이뤄졌다. 첫 번째는 이론교육. 서핑의 기본에 대해 듣는 시간이다. 안전수칙과 서핑 용어, 서핑 룰과 매너를 철저하게 배웠다. 특히나 주말에는 좁은 해변에 인파가 많이 모여 부상을 입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고 한다. 언제나 자신의 보드를 챙길 것을 명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상 교육 차례가 되자 드디어 서핑보드를 만져보게 됐다. 숍 오른쪽에 나란히 세워져 있는 비비드한 컬러의 보드 중 하나가 내 차지가 됐다. 마음속으로 '오늘 하루를 잘 부탁해' 인사를 건네고 바다로 걸어 나갔다. 하지만 아쉽게도, 바로 바다로 들어가는 건 아니었다. 모래밭 위에 보드를 놓고 패들링과 스탠드업을 먼저 배워야 했다. 바닷속이라고 생각하고 손끝으로 모래를 밀어내는 연습, 보드 위에 두 발로 서는 연습을 충분히 한 후 드디어 발목에 리쉬(보드와 몸을 연결해주는 줄)를 연결했다.

아쉽게도 그날 바다는 거의 호수처럼 보일 정도로 잔잔했다. 하지만 정대현 서퍼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 날일수록 기본기를 쌓기가 더 좋다며, 실전 강습을 시작했다. 보드 위에 엎드려 패들링을 하다 '업'하는 구호와 함께 상체를 일으켜 세운 뒤 다리를 끌어당겨 보드 위에 선다. 아니, 서려고 노력한다.

정말 몇 번이나 코로 물을 마셨는지 모르겠다. 넓은 롱보드 위, 발을 디딜 곳이 그렇게나 많은데도 중심을 잃기를 몇십 번. 슬슬 체력이 다하고 패들링에 힘이 빠졌다. 단 한 번이라도 서보고 싶었기에 정대현 서퍼를 계속 괴롭혔지만, 어느 순간 정말로 포기를 하게 됐다. 균형 감각이라는 걸 아예 모르는 몸뚱이구나 싶었다. 이제 그만 타겠다고 하자 정대현 서퍼는 오히려 마지막으로 한번 더 타보라며 보드를 밀어주었다. 별 기대 없이 이를 악물고 패들링을 하고 몸을 일으켜세웠다. 그리고 드디어, 처음으로 성공했다.

보드 위에 두 발로 서서 모래사장까지 밀려 나갔다. 파도가 없었던 탓에 아주 빠르지도 아주 느리지도 않았지만, 기분만큼은 정말 짜릿했다. 물에 빠질 듯 말 듯하면서도 파도의 속도를 그대로 즐길 수 있었다. 파도가 없는 날에도 이렇게 재미있는데, 파도가 있는 날이었다면, 그리고 그 파도가 빠른 속도를 낸다면 얼마나 더 즐거울까를 상상하게 됐다. 그때 오래된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아무도 없는 3월의 추운 바다에서 외롭게 패들링을 하던 그 사람. 그 사람이 왜 그랬는지 약간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서핑을 배운 후 숍으로 돌아왔더니 SUP(서서 타는 패들보드)가 눈에 들어왔다. 서핑보드보다는 조금 더 쉬운 난이도라고 해서 잠깐 맛을 봤다. 양팔을 사정없이 젓는 대신 일어선 상태로 노를 저어 멀리까지 나갈 수 있다는 게 무척 매력적이었다. 힘이 들면 SUP 위에 양반다리로 앉을 수도 있었고, 도전해보지는 않았지만 누울 수도 있다고 했다. 작은 배를 탄 것처럼 죽도암 근처를 탐방하며 물고기 떼를 볼 수도 있어 여러모로 매력적이었다.

김민정 여기어때 액큐가 모래밭 위에 보드를 놓고 패들링과 스탠드업을 배우고 있다.(사진=여기어때)
김민정 여기어때 액큐가 모래밭 위에 보드를 놓고 패들링과 스탠드업을 배우고 있다.(사진=여기어때)

패들보드까지 마치고 물 밖으로 올라오자 온몸이 축 처졌다. 액티비티 큐레이터 활동을 하며 온갖 레저스포츠를 겪어봤지만 이 정도로 힘든 건 처음이었다. 복근까지 꽉 짠 듯이 당겨오는 게, 온 몸의 근육을 살뜰하게 사용했다는 걸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무척이나 피곤했지만 그만큼이나 충실한 시간을 보낸 것 같아 뿌듯했다. 살짝 끼는 듯한 슈트를 벗어던지고 따뜻한 물에 샤워를 하고 나왔다. 불어오는 바람에 머리카락을 말리며 바다를 바라보자 제법 파도가 일고 있었다.

'저 파도 위에 서면 어떨까' 고민하다가 문득 명언이 하나 떠올랐다. 서핑 로드트립 이야기를 책으로 낸 앨런 위즈베커의 말이었다. 그는 주변에서 서핑을 배우고 싶다는 사람이 있을 때, 딱 한 마디를 던진다고 했다.

“모든 게 달라질 수 있으니 조심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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