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투데이 석대건 기자] 처음 어머니에게 글을 쓰며 살겠다고 고백했을 때, 어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그게 얼마나 어려운 줄 알고서 하는 말이냐”

전혀 몰랐다. 읽고 쓰는 일은 어려웠고 잔인했다. 기자는 18시가 되었다고 일이 끝나는 직업이 아니다. 생각을 정리하고, 팩트를 확인한 다음, 기사를 적어야만 끝났다. 그래야만 하루가 끝났다.

하지만 다음 날이 시작되기도 전에 일이 시작된다. ‘무엇을 쓸 것인가’라는 물음이 매일밤을 누른다. 

스스로 ‘나는 소리를 내는 기자’라며 애써 다짐하지만, ‘소리를 쫓는’ 기사가 더 쉬웠다. 전달은 편했고, 수정은 할 만했다. 그 유혹을 참기란 생각보다 어렵다. 

고백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는 “할 만하냐”고 다시 물었다. 머뭇거렸지만, 어렵사리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낼 수 있다”고 답했다. 어머니는 못내 응원한다고 말씀하셨다.

오늘은 고(姑) 노회찬 국회의원의 영결식이다. 페이스북의 타임라인에는 그를 추모하는 글이 끊이지 않고 올라오고 있다. 그중 하나의 글이 기자의 눈을 잡았다.

손희정 문화평론가는 “여성 노동 운동, 차별금지법 제정 운동, 장애 인권 운동, 청소년 참정권 운동, 평화 운동, 성소수자 인권 운동 등을 했던 단체들과 활동가들이 계속해서 노회찬 의원의 죽음을 애도하고 그를 추모하는 진심 어린 글들을 올리고 있다”고 있다고 적었다. 그리고 "그 모든 자리에 그가 있었다는 말이겠다. 그런 말이겠다"고 덧붙였다.

하나 같이 우리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과 관련된 사회 운동이다. 기술은 발전했지만, 적어도 낮은 자들의 삶은 그다지 나아지지 않았다. 그건 시대가 변했어도 노회찬이 끊임없이 낮은 곳으로 향했던 이유와도 같을 것이다.

姑 노회찬 의원이 마지막으로 머문 사람은 ‘KTX 승무원’과 삼성전자 반도체 백혈병 관련 조정 합의를 이룬 '노동자 가족'과 단체 ‘반올림’이었다. 여기까지 10년의 세월이 걸렸다. 기자는 다음 주 기사로 10년 동안 KTX와 삼성전자는 어떻게 변했는지 취재하려고 했다. 

기사를 쓸 수 없을 때, 그가 있는 곳을 취재하면 될 텐데. 이제 힌트를 받을 수 없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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