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투데이 석대건 기자] 평소와 다를 것 없던 저녁이었다. 지난주까지만 해도 불던 찬 바람은 시원하게 느껴졌다. 혜선(가명)은 창문을 조금을 열고 침대에 누웠다. 그녀는 이제 반팔을 꺼내야겠다고 생각하며 스마트폰을 쥐었다. 그때였다. 은서(가명)에게 카톡이 왔다. 

— 언니. 어떡해.ㅜㅜ

은서는 혜선의 대학 후배였다. 둘은 같은 동아리에서 활동하며 친해졌다. 졸업 후에도 만나며 서로 어려운 일 나누는 사이였다.

— 왜왜? 무슨 일이야? ^^
— 언니가 나온 동영상이 있어.

화면은 흔들리다 멈췄다. 그곳에 내가 있었다.

동영상이라는 단어에 혜선의 마음이 무너졌다. 하지만 그땐 몰랐다. 끝나지 않은 아픔이 기다리고 있었다. 

혜선처럼 지인으로부터 피해 사실을 듣게 되는 경우는 드물었다. 대부분의 '리벤지포르노' 피해자가 피해 사실도 모른 채 지낸다. 혜선은 운이 좋았다. 아니, 운이 나쁘다고 해야 할까.

은서는 의도치 않게 동영상을 접했다. 은서의 졸업생과 재학생으로 구성된 그룹 카톡방이 있다. 지난밤, 그 채팅방에 카톡방에 음란 사이트의 URL 하나가 올라왔다. URL을 공유한 사람은 ‘좋은 사이트 공유한다. 외로움 달래라’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그룹 채팅방을 나갔다. 그 사람은 은서가 이름만 알던 남자 선배였다.

카톡 메시지는 1초 이상 누르고 있으면 삭제할 수 있다. 은서는 URL이 적힌 메시지를 지우기 위해 눌렀다. 그런데 실수로 사이트에 들어가고 말았다. 그리고 혜선을 발견했다.

— 내가 맞아? 혹시 볼 수 있어?

혜선은 무서웠다. 잠시나마 제발 ‘나는 아니길’ 바랐다. 또 다른 피해 여성임을 알면서도 그런 마음이 들었다. 재생을 눌렀다. 화면은 흔들리다 멈췄다. 그곳에 혜선이 있었다.

동영상을 없앨 수 없다면, 내가 없어지겠다

혜선은 한참 울었다. 정신없이 울면서도 동영상을 머리에서 지울 순 없었다. 

‘누가 올렸을까’ ‘어떻게 지워야 하나’ ‘이제 누굴 만날 수 있을까’ ‘학교 사람들은 다 알고 있을까’ ‘회사 남자들도 이미 본 건 아닐까’ ‘엄마에게 말해야 할까?' '뭐라고 하실까?’ 

걱정은 끝도 없이 계속되었다. 걱정이라는 단어에 그때의 마음을 담을 수 없었다. 

혜선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방에서도 나갈 수 없었다. 혜선은 ‘동영상을 지울 수 없다면 내가 없어져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면 아프지 않아도 된다. 죽으면 끝이다.

— 언니. 제가 도울게요. 나쁜 생각은 하지 마세요.ㅜㅜ

은서에게 전화가 왔다. 우선 경찰에 신고하자고 했다. 하지만 어디에 전화해야 할지 막막했다. 112에 신고하면 집으로 찾아올 것 같았다. 

사이버수사대를 검색했다. 손이 떨렸다. 다시 눈물이 흘렀다. 눈을 뜰 수 없었다. 겨우 사이버수사대 웹사이트를 찾았지만 신고 번호를 찾을 수 없었다.

— 은서아. 신고 번호를 못 찾겠어. 대신 신고 좀 해줄래?? 

사이버 범죄 수사를 위해 경찰은 피해자에게 직접 출석, 적극 협조, 7일 이내 통보, 경찰서 직접 방문 등을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디지털 성폭력 피해자에게 위의 조건들은 이행하기 어렵다. (사진=경찰청)
사이버 범죄 수사를 위해 경찰은 피해자에게 직접 출석, 적극 협조, 7일 이내 통보, 경찰서 직접 방문 등을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디지털 성폭력 피해자에게 위의 조건들은 이행하기 어렵다. (사진=경찰청)

혜선은 고맙다는 말을 전했다. 은서는 지금 찾아 가겠다며, 제발 나쁜 생각만은 하지 말라 했다. 하지만 혜선은 굳이 오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혜선은 지금 누굴 만날 수 없었다. 그날 밤, 그녀는 어떻게 잠이 들었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어제와 같은 혜선의 오늘

오늘은 어제와 달라지지 않았다. 혜선은 회사에 갈 수 없었다. 아프다고 했다. 엄마에게 전화가 왔지만 받지 않았다. 받을 수 없었다. 

은서가 찾아왔다. 경찰에 전화했더니, 동영상 URL을 방송통신위원회에 먼저 신고하라고 했단다. 그래서 혜선은 은서와 함께 방송통신위원회에서 연락했다. 3일 이내에 조치될 거라고 한다. 예전에는 10일 정도 걸렸단다.

처음엔 신고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한참 찾았다. 알고 보니 정확하게 ‘방송통신위원회’가 아니라 ‘방송통신심의위원회’였다. 거기서 ‘인터넷피해구제센터’에서 ‘권리침해 정보심의’로 가야 했다. 

혜선은 생각했다. ‘내가 인터넷 피해자이고, 나는 권리를 침해받을 것일까? 내가 피해자임을 증명하는 게 이렇게 고통스러워도 될까?’

— 언니. 있잖아요.

은서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경찰이 피해 증거 수집은 직접 해야 된다며, 동영상을 한 번 더 봐야 한다고 말했다. 캡처 이미지가 증거로 인정되려면 혜선의 성기가 찍혀야 했다. 혜선은 버틸 수 없었다. 

동영상 속에서 혜선과 함께 있었던 사람은 연락이 끊어진 지 오래다. 연락이 된다고 해도, 지금의 혜선으로선 그 사람을 상대로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동영상은 음란물 사이트를 통해 계속 공유된다.
동영상은 음란물 사이트를 통해 계속 공유되고 있다.

디지털 장의사라는 직업이 있다. 돈을 주면 동영상을 찾아 해당 사이트에 삭제 요청도 하고 증거 수집 작업도 대신 해준다. 혜선은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불안했다. ‘그들도 나를 보겠구나. 나는 오늘도 죽겠구나.’ 혜선은 디지털 장의사 업체와 매달 200만 원, 3개월 계약을 맺었다. 업체에서는 6개월은 작업해야 지워진다고 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만큼 돈이 없었다. 

언제까지 죽어야 할까

혜선은 도움받을 방법을 찾아야 했다. 어렵지 않게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한사성)와 디지털성범죄아웃(DSO)을 발견했다. 사건 경위서도 써주고, 디지털 장의사에게 맡겼던 증거 수집 작업도 도움받았다. 혜선은 그들이 무조건 자신의 편을 들어주고, 끝도 없는 아픔을 알아주는 게 고마웠다. 또 자신과 같은 여성들이 많다는 것에 놀랐다. 은서의 카톡을 받았던 그 날 이후, 처음으로 힘을 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6월부터는 정부에서도 동영상 삭제 지원을 해준다는 뉴스를 봤다. 그녀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아무리 신고해도 음란물 사이트는 사라지지 않았다. 사이트는 URL만 바꿔 그대로 남아 있었다. 경찰은 해외서버라 그렇다는 말을 반복했다. p2p 공유사이트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영상을 삭제 요청해도 다른 제목, 다른 파일 형식으로 업로드됐다. 

혜선의 몸은 혜선에게 있지 않았다. 동영상은 끊임없이 공유되었고 혜선은 끝도 없이 죽었다.

(본 기사는 가상으로 구성되었습니다. 그러나 사실을 기반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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