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폐란 무엇인가?' 3-4년전만 해도 우스꽝스러운 질문이지만 요즘은 그렇지 않다. 가상화폐가 화폐냐 아니냐 또는 앞으로 화폐가 되냐 안되냐 논쟁이 큰 화두다.

화폐는 중앙은행이 발행한 지폐와 동전이라는 매우 확고한 생각이 우리를 지배하는 중이다. 그것만 화폐라면 실물 없이 전자적 기록에 불과한 은행 예금은 화폐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지폐와 동전에 의한 지급결제보다는 예금에 의한 지급결제 비중이 훨씬 더 크다. 카드대금 결제를 예금으로 하지 지폐와 동전으로 하지 않는다. 통화량 지표 M1은 현금통화와 예금통화로 구성된다. 전자는 중앙은행이 발행한 실물의 지폐와 동전이고, 후자는 일반 상업은행이 발행한 예금이다. 결국 M1은 중앙은행과 상업은행이 발행한 부채증권이자 채무증서이다. 이를 채무화폐 또는 신용화폐라고도 부른다.

빈기범 명지대 경제학과 교수

첫째, ‘가상화폐는 실체가 없고 그래서 펀더멘털도 없다’고 한다. 은행 예금만 보아도 이 말이 맞지 않는다. 은행 예금도 전자적 기록일 뿐 실제로 만질 수 없다. 내 돈이 은행에 잘 보관되어 있는지 본 적도 없다. 은행 가서 1억원을 빌리면 새로 만든 대출 통장에 100,000,000이라는 숫자로 전자적 기록만 찍힐 뿐이다. 예금이나 가상화폐나 전자적 기록이다. 그걸 실체가 없다고 한다면, 현금통화보다 훨씬 많이 사용되는 예금통화도 실체가 없는 것이다.

나아가 중앙은행이 발행한 지폐와 동전은 실물적 가치가 있는가? 금태환이라도 되는 시절이라면 실재하는 금이 화폐가치다. 지금은 세상 어느 화폐도 그런 태환되는 실물 또는 상품이 보관되어 있지 않다. 단지 종잇장에 불과한 1만원권 지폐를 아주 많은 사람들이 1만원 상당의 물품과 교환할 수 있는 구매력이 있다고 (이유는 사실 명확하지 않지만) “믿기” 때문에 1만원의 가치가 유지된다. 신용화폐의 특성이다. 그렇게 보면, 실물이지만 지폐와 동전의 가치도 상당히 가상적이다.

둘째, ‘가상화폐는 법정화폐가 아니’라는 것이다. 법이나 공권력이 화폐가치를 100% 설명할 수 없다. 북한에서는 법은 물론이고 총칼로 화폐가치를 강제하지만 북한 주민은 적국 美帝의 화폐인 달러화를 너무나도 선호한다. 동남아에 가면 자국 화폐 거부하고 달러화 또는 한국 원화라도 달라고 한다. 결국 많은 사람들이 가치가 있다고 믿고 교환 시 수용하면 그것은 화폐가 된다. 자국 화폐를 못 믿는 자국민을 탓할 게 아니다. 화폐의 발행과 유통 시스템에 심각한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엉터리 화폐를 두고 가치가 있으라는 법이나 공권력이 더욱 문제이다. 자국 화폐 관리 능력이 안되면, 아예 자국 화폐 발행하지 않는 게 낫다. 타국 화폐인 달러화를 화폐로 쓰면 된다. 이를 ‘달러라이제이션(dollarization)’이라고 한다.

셋째, ‘가상화폐는 투기 대상이므로 화폐가 될 수 없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는 알게 모르게 화폐에도 투기한다. 주식, 채권, 부동산 등 다른 주요 자산 가격이 떨어질 것 같으면, 우리는 현금을 보유하고자 한다. 상대적으로 현금 가치가 상승할 것으로 믿기 때문이다. 디플레이션 상황이 예견되면 현금을 보유한다. 현금 보유는 현금 가치가 오른다는 기대에 입각한 투기 행위이다. 저명한 경제학자 케인즈(John M. Keynes)도 화폐 투기 현상을 ‘투기적 동기에 의한 화폐 수요’라고 하였다. 그게 너무 심한 상황을 ‘유동성 함정(liquidity trap)’이라고 했다. 유동성 함정은 심각한 경기침체를 야기한다.

넷째, ‘가상화폐는 가치가 심하게 변동하므로 화폐가 될 수 없다’고 한다. 세상에 가치가 변동하지 않는 자산은 단 한 개도 없다. 지금 이 시각에도 우리 자국화폐 원화 가치는 변동하는 중이다. 원/달러 환율, 주가, 채권가격, 부동산 가격, 금 가격, 원유 가격이 실시간으로 변화한다. 분명히 원화가치는 변동 중인데, 왜 원화는 화폐로서 가치 변동이 없거나 심하지 않다고 생각할까? 이는 우리의 자국 화폐인 원화를 가치 평가의 기초적 기준, 즉 ‘뉴머레어(numeraire)’로 고정한 관행적 사고 때문이다. 달러화가 뉴머레어가 되면, 원화는 가치 변동이 비교적 큰 자산이 된다. (역으로, 원화가 뉴머레어이면 기축통화인 달러화도 가치 변동이 큰 자산이다.)

뉴머레어를 금으로 바꾸어 보자. 역시 원화는 가치변동이 크다. 가치변화를 논할 때 무엇이 뉴머레어인가를 우선 명확히 해야 한다. 모든 가격은 본질적으로 상대가격(relative price)이므로 고정점이 필요하다. 만일, 비트코인이 뉴머레어이면, 1비트코인은 항상 1비트코인인 변동성 0인 안정적 자산이다. 이 때 역으로 원화나 달러화는 매우 변동성이 큰 자산이다.

이런 약간 복잡한 문제를 차치하더라도, 물가는 지속적으로 오른다. 지금 10,000원짜리 물건이 항상 10,000원의 가치를 유지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심각한 인플레나 디플레는 필연적으로 화폐의 기능을 약화 또는 상실시킨다. 그 경우 다른 대체 수단이 화폐로 등장하려 한다. 물가야 적당히 오른다 쳐도, 주가, 부동산 등 자산 가격이 크게 상승하는 것 역시 화폐 시스템에 대한 신뢰를 약화시키게 된다.

가상화폐를 두둔하고 앞으로 화폐가 될 것이라는 예언을 하고자 함이 아니다. 대부분의 예언에는 혹세무민이 담겨 있다. 미래의 사태는 현재로서는 지극히 확률적이다. 하지만 작금의 상황처럼 가상화폐만 문제라고 탓할 게 아니다. 한국을 포함한 전세계가 취한 양적완화, 저금리 그리고 팽창적 통화정책을 되돌아 보아야 한다. 실로 엄청나게 오른 주가와 부동산 가격은 크게 늘어난 통화에 상당히 기인한다. 그런 기회는 보편적이고 균등한 게 아니라 부유층으로 편중된다. 한국만의 현상은 아니다.

현행의 기축통화인 달러화 그리고 각국 통화 시스템은 그 가치에 대한 충분한 믿음을 주어야 영원히 유지된다. 그 믿음이 커지면 가상화폐는 약화되고, 믿음이 작아지면 가상화폐는 살아날 것이다. 가상화폐 존립을 예언할 게 아니라, 현행 통화 시스템 존립의 문제부터 걱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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