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A대학 국문과에 재학 중인 신모양(21·서울)은 출력속도가 빠르다는 광고만 믿고 최근 구입한 유명 업체 잉크젯프린터에 대한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다양한 형태의 도표나 그래픽으로 작성한 리포트를 집에 설치된 프린터로 출력하면 제목과 학과, 이름, 학번이 간단히 적혀 있는 첫 번째 페이지만 빠른 속도로 나올뿐, 본 내용이 시작되는 다음 페이지부터는 제품 성능에 표기된 것과는 판이하게 느린 속도로 문서가 인쇄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제품 사양에는 고속모드를 기준으로 한 출력속도가 표시돼 있지만, 실제 고속모드로 출력하면 출력물에 선이 생기거나 색상이 제대로 표시되지 않는 등 품질이 조악해져, 결국은 속도는 느려도 일반모드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다.

적당한 품질로 출력해주는 일반 모드 속도는 제품사양에 표시된 출력속도와는 현저히 다른데, 왜 제품성능 표시를 비현실적인 고속모드로 적어 놓았는지 모르겠다고 불만을 털어놓는다.

신양의 경우는 사실 일반적인 잉크젯 프린터 사용자라면 누구나 접했을 법한 상황이다. 그렇다고해서 제조사들이 제품을 써보고 구매하도록 배려해 주는 것도 아니어서 소비자들은 답답하기만 하다. 제품에 표기된 숫자와 실제가 너무 달라 속은 기분이 든다고 말하는 이들까지 있을 정도다.

“초당 32PPM으로 빠르게! 잉크 한 통으로 최대 …매까지 출력....”

통상적으로 접할 수 있는 프린터 광고 문구다. 하지만, 이러한 프린터 광고에서 말하는 속도나 잉크 한통당 최대 출력량을 실제 사용에서 기대한다면 크게 실망하게 될 것이다.

물론 업체들이 얘기하는 성능이나 특성이 그대로 구현될 것으로 믿는 이들도 드물겠지만, 프린터의 경우는 근본적으로 업체들이 채택하고 속도표시 기준에 문제가 있기 때문에 광고와 실제의 엄청난 괴리는 태생적으로 예정돼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프린터 업체들은 ‘고속기준, 자사양식’으로 측정한 출력속도를 제품사양에 표기한다. 여기서부터 오류가 시작된다. 소비자들이 가정 등에서 사용하는 환경을 완전히 무시한채 빠르게 출력된다는 점과 잉크 절약형이라는 점만 부각시키기 때문이다.

그 결과, 신양의 예처럼 정작 소비자들이 고속모드로 출력하면 프린팅 품질이 떨어지고, 일반모드로 출력하면 제품사양에 표시된 속도가 나오지 않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그 때문에 대다수 프린터 사용자들은 프린터 업체가 표기한 고속모드가 아닌 일반모드로 설정해 출력하고 있다.

프린터 업체들도 일반모드로 사용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프린터를 지원하는 프로그램의 설정모드나 설명서를 보면 ‘고속모드 출력 시 품질의 저하를 가져올 수 있다’며 고속모드가 아닌 일반 모드를 권장하고 있다. ‘고속기준’을 전제로 표기한 출력속도가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스스로 밝히고 있는 셈이다.

프린팅 속도를 측정하는 데 각사가 나름대로의 ‘자사양식’을 사용하고 있는 것도 문제다.

일반 소비자들은 프린터들이 대부분 ‘PPM’ 단위의 출력속도를 표기하고 있기 때문에, 각 업체들이 동일한 잣대를 동원해 속도를 측정해 표시한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러나, 속내를 들여다 보면 얘기는 전혀 다르다. 기업들이 공통의 표준화된 문서양식을 출력해서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회사 마다 다른 양식으로 측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대부분의 기업이 그 ‘자사양식’이라는 것도 공개하지 않고 있어, 소비자들은 기업들이 어떤 기준으로, 어느 정도의 출력물을 프린팅해서 출력속도를 표시한 것인 지를 알 방법이 없다.

다시 말해, 프린터 업체만 알고 있는 ‘자사양식’으로 측정했다는 결과물을 통해 소비자들에게는 ‘빠르다’, ‘절약형이다’라고만 알리고 있는 것이다.

 

ISO 기준문서 중 PDF 기준문서 첫번쩨 페이지로 왼쪽이 일반 모드, 오른쪽이 고속 모드이다.
확대 그림을 보면 고속모드의 사진 품질이 눈에 띄게 떨어지고 노이즈가 많아지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최근 들어 국제표준기구(ISO)가 이같은 문제점들을 감안, 현실성 있는 프린터 출력 속도 측정을 위해 고속이 아닌 일반모드를 기준으로 하고, 공통양식을 마련해 제시하는 등 객관적이고 변별력 있는 출력속도 측정 기준 ‘IPM(image per minute)’을 제시했음에도 불구,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채택에 적극성을 보이지 않고 있다.

하지만, 프린터 출력속도 표시의 허구성에 대한 인식이 확산되고 있고, 이를 바탕으로 프린터 구입시 보다 정확한 정보를 바탕으로 비교구매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돼야 한다는 소비자들의 목소리가 갈수록 높아지고 있어, 객관적이고 투명한 IPM 기준으로의 이전은 불가피해 보인다.


실제, IT전문 사이트 베타뉴스, 프린터넷, IDG Korea, 테크노아가 지난 3월 5일부터 15일까지 10여일간 총 2038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도 74%가 프린터 출력 시 일반모드로 사용하고 있고, 81%가 실제 사용 속도와 제품 정보 상의 속도가 차이가 있다고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유저의 87%가 PPM에 대해 알고 있고, 83%가 스펙 표기상 출력속도의 불합리성을 인지하고 있었다.

고속모드로 출력시 최고속도를 나타내는 단위인 ‘PPM’과 일반모드에서의 출력속도를 나타내는 단위인 ‘IPM’ 중 어느 쪽이 프린터 스펙 표기에 있어 적절하다고 생각하느냐는 물음에도 66%가 ‘IPM’을 꼽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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